‘코트의 마법사’ 별명 얻게 해준 할아버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중학교 때 대회에 나가 경기를 하던 중에 우리 팀 중 한 명이 3점슛 라인보다 더 먼 거리에서 훅슛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처음 만난 건 송도중학교에 입학해 농구부 감독과 상견례를 할 때다. 젊고 키가 큰 감독님이겠거니 했는데 예순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할아버지는 송도중고교 농구부를 맡고 있는 전규삼 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할아버지는 매 한 번 들지 않았고 우리를 손자처럼 대했다. 제자들과 심심풀이 고스톱을 칠 만큼 격의가 없고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허동택(허재 강동희 김유택) 트리오’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할아버지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중앙대에 보내려 했다. 당시 중앙대 감독이던 정봉섭 선생님이 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할아버지는 정 선생님과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나는 연세대나 고려대에 가고 싶었다. 허재 형과 유택이 형을 포함한 쟁쟁한 선배들이 버티고 있던 중앙대로 가면 주전으로 뛸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연세대와 고려대도 나를 데려가려고 했다. 고3 때 연고대를 고집했더니 할아버지는 “너는 내 새끼가 아니다”라며 팀에서 쫓아냈다. 보름 넘게 쫓겨나 있다가 결국 할아버지에게 백기 투항하고 중앙대에 입학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농구로 나를 야생마처럼 키운 분이 할아버지라면 대학 스승인 정 선생님은 야생마 같은 나를 길들여 완성된 농구 선수로 만들어 주신 분이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정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났다. 1학년 때 한 실업팀과 연습 경기를 하던 중 정 선생님은 나를 벤치로 불러들인 뒤 바닥에 무릎을 꿇게 했다. 중고교 때 몸에 밴 현란한 기술농구가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정 선생님은 팀플레이를 중요하게 여겼다. 강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선수들을 엄하게 다스린 정 선생님은 할아버지와 지도 스타일이 많이 달랐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만은 할아버지 못지않았다. “공을 코트에 한 번 튀길 때마다 100원짜리 동전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해라.” 정 선생님이 가드인 나에게 드리블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 얘기다. 나는 정 선생님에게서 끊임없는 연습의 중요성과 강한 승부욕을 배웠다.
지금의 강동희를 있게 한 할아버지는 2003년 5월 8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나는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사흘 밤낮을 울어대다 지쳐 쓰러졌다. 내년이면 10주기다. 할아버지를 기리는 조촐한 행사를 준비할 생각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또 다른 한 분인 정 선생님도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