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은 서로의 삶을 주고받는 능력…‘인복’에 해당
조선 시대에는 이걸 ‘한 큐’에 해결하는 기막힌 풍속이 하나 있었다. ‘과객질’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 어디든 과객이 묵어가겠다고 하면 주인들은 마땅히 먹여주고 재워줘야 했다. 하여 이들은 길 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먹고 마시고 싸우고, 그러다가 사랑을 하고 평생을 함께할 친구들을 만난다.
불행히도 20세기 이후 이런 ‘미풍양속’은 사라져버렸다. 이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럼 백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풍속을 개발하면 된다. 먼저 주변의 공공시설을 적극 활용하라. 예컨대 내가 사는 동네에는 ‘남산순환도로’가 있다. 서울 시내에서 이보다 더 좋은 휴식처와 산책로는 없다. 이걸 적극 활용할 수 있다면 무상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는 셈이 된다. 비단 여기뿐이랴. 전국 곳곳에 도서관과 문화센터, 시민공원 등이 즐비하다. 이 시설들을 잘 활용하면 최고의 문화생활을 공짜로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이런 곳에서 인문학 특강도 자주 열린다. 역시 거의 무료다. 친환경적 시설에서 책 보고 음악 듣고 수준 높은 강의 듣고. 억대 연봉을 받는 정규직도 이런 생활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자, 그 다음은 인맥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람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서사와 경청이다. 일곱 두령은 일자무식이다. 하지만 입담 하나만은 끝내준다. 또 진심을 다해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래서 누구든 하룻밤만 같이 보내고 나면 천하에 둘도 없는 벗이 된다. 주변의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것이 물질의 순환이라면, 인맥을 확보하는 것은 무형적 가치들의 순환이다.
인맥이라고 하면 학연, 지연, 파벌 등을 떠올린다. 그건 솔직히 인맥이 아니라 서로를 ‘우려먹기’ 위한 정보에 불과하다. 그와 달리 인맥은 정보가 아니라 능력이다.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삶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 쉽게 말해 ‘인복’이 여기에 해당한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어떤 ‘빵빵한’ 스펙도 인복의 힘을 능가할 수는 없다. 요컨대 몸과 공간, 사람과 사람,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이 곧 브리콜라주의 경제학이자 백수들의 ‘야생적’ 생존법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