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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상복의 남자이야기]백화점에 ‘남편방’을 만들어주세요

입력 | 2012-06-09 03:00:00


벌써 세 시간째다. 발바닥에 불이 난 것 같고 허리도 아파온다.

“이거 어때? 괜찮지?”

피팅룸에서 나온 아내가 한 바퀴 돌면서 남자에게 묻는다. 그는 안면근육을 조작해 감탄하는 표정을 짓는다.

“잘 어울리는데! 그걸로 하자.”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른다. 이쯤에서 적당한 타협과 구매가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피곤하다. 전문가들이 남녀의 쇼핑 패턴을 조사한 결과 남성들이 한 곳에만 들러 평균 6분 만에 쇼핑을 마치는 반면에 여성들은 여러 곳을 다니며 평균 3시간 26분을 쓴다는 분석이 있었다. 남녀가 함께 쇼핑을 할 경우 대략 72분이 남성이 참을 수 있는 한계라는 얘기도 있다.

남자는 아내를 사귀던 시절부터 ‘쇼핑’ 하면 ‘강제노역’을 떠올리곤 했다. 한낮에 백화점에 들어가면 밤이 되어서야 풀린 걸음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평소엔 가까운 거리도 안 걸으면서 백화점에선 굽 높은 구두로도 끄떡없는 그녀가 불가사의였다.

여성들이 쇼핑에 강한 이유는 그렇게 진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냥꾼의 후예인 남성이 목표물에만 집중하게 된 것과는 달리 채집 담당이었던 여성은 여러 가지를 두루 살피는 능력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

남자는 ‘인류사에서 남녀가 함께 쇼핑하게 된 것 이상의 비극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내에게는 그런 생각을 말해본 적은 없다.

아내 앞에선 백화점에 불만이 많다. 매장마다 조그만 의자라도 놓아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몇 시간 동안 끌려다니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까지 내야 하는 남성들을 위해서.

남자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호주의 어떤 매장에 ‘남편 맡기는 곳’이 생겼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잡지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아내를 기다리라고 마련한 곳인데 대성황이라는 거였다.

남자는 다른 매장으로 향하면서 아내에게 “백화점에 제안을 해보겠다”고 자랑을 했다. 아내가 통박을 했다. “뭘 얼마나 돌아다녔다고 그래? 백화점 같이 온 게 그렇게 못마땅해?”

남자는 발끈했다.

“누가 그렇대? 그럼 당신도 내일 나랑 새벽에 낚시 가자.”

아내가 강하게 나왔다.

“가자. 누가 못 갈 줄 알고?”

남자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낚시터의 ‘침묵계율’을 아내가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여자들이 살찌는 것 다음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입 다물고 버티는 건데. 낚시 친구들의 얼굴에 나타날 뜨악한 표정이 눈에 선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아내가 쩔쩔매는 그에게 쇼핑백을 안기며 선심을 썼다. “됐어. 안 갈 테니까 이거나 들어.”

한상복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