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르 드가, 압생트. 1876년. 아트블루 제공
요즘 참 무서운 게 많지만 ‘조폭’보다 무서운 게 바로 이거랍니다. ‘주폭’이죠. ‘주취폭력자’의 준말인데, 실제로 ‘조폭’은 평생 보기 힘들지만 ‘주폭’은 야밤의 길거리에 널려 있죠. 게다가 여자 ‘조폭’은 ‘조폭 마누라’ 같은 영화에나 나왔지만, 여자 ‘주폭’은 바로 이웃에도 살고 있단 말이죠. 아니 요즘엔 30대 주부들 중에도 부엌에 술을 숨겨두고 습관적으로 마시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군요. 애 젖병 물리면서 엄마도 한 잔, 한 손으로 청소기 돌리면서 한 잔. 집 안에서 그러는 것도 큰 문제지만, 술만 마시면 괴물이 되어 이웃이나 불특정인을 괴롭히거나 우발적인 살인이나 폭력을 쓰는 사람들. 참 난감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사람들은 술이 깨면 ‘필름이 끊어졌다’라는 말로 모든 걸 무마하려 든다는 겁니다. 그럼 또 ‘사람이 뭔 죄야? 그놈의 술이 문제지’라고 술 탓을 하며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요즘은 필름 카메라 시대도 아니고 디카의 메모리도 얼마나 용량이 큰데, ‘필름’ 타령을 하고 있는 건지.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참 술에 약한 존재입니다. 술이란 참 묘한 음식이지요. 술은 나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주니까요. 이성을 마비시키고 판단력을 흐리게도 하지만 감성을 자극하며 새로운 영감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술은 특히나 예술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술가들에게 술은 작품을 마술처럼 술술 풀리게 하는 묘약일까요?
19세기, 특히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특이하게도 이 술이 소재로 참 많이 등장합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의 녹색 술. ‘녹색의 요정’ ‘에메랄드 지옥’ 등으로 불리는 마법의 술 압생트(Absinthe) 말입니다. 향쑥을 주원료로 한 40∼70도의 쓰고 독한 술입니다. 고흐, 로트레크, 드가, 피카소, 마네, 모파상, 헤밍웨이, 포, 랭보 같은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술입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이유는 도수는 높으나 값이 저렴한 술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독해서 압생트 옆에는 물병이 놓여 있는 그림이 많지요. 독주에 계속 물을 타 마시면 아주 오래 마실 수 있기 때문이죠. 다른 방식으로 마시는 방법도 있는데, 잔 위에 구멍이 숭숭 뚫린 커다란 숟가락을 걸쳐 놓은 후 그 위에 각설탕을 올려놓고 얼음물을 부어 마시거나 숟가락 위의 각설탕에 압생트를 적셔 거기에 불을 붙여 설탕을 녹여 내려 마시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신비로운 술은 오랫동안 제조와 판매가 금지됐었죠. 왜냐고요? 압생트의 어떤 성분이 강한 중독과 환각 증세를 가져오고 정신착란을 일으킨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지요. 이 술에 중독된 로트레크나 고흐는 결국 불행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특히 고흐는 이 술로 인해 정신착란의 광기를 보여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설이 있지요. 고흐가 그림에 노란색을 많이 쓴 것이 이 술을 먹었을 때의 부작용인 ‘황시현상’ 때문이라는 설도 있답니다. 어쩌면 고흐나 로트레크는 ‘주폭’의 원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압생트의 환각작용으로 일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감을 얻은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 되는 주폭이라면 용서가 좀 될까요?
그림 속에서 드가가 자주 들르던 카페에 압생트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여인은 당시의 여배우인 엘렌 앙드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왠지 처연해 보이는군요. 하긴 아직 술잔이 안 비었군요.
권지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