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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있어도 외롭지만 떠나면 눈물나는… 사랑

입력 | 2012-06-09 03:00:00

◇태연한 인생/은희경 지음/268쪽·1만2000원·창비




창비 제공

맛깔난다. 일상의 편린 속에서 끄집어낸 보석 같은 대화들은 활어처럼 싱싱하고 감칠맛 난다. 이를테면 까칠한 소설가 요셉과 그의 팬이자 불륜 파트너인 도경의 매운탕집 식사 장면은 이렇다.

도경이 하얗게 생선살을 발라놓은 요셉의 앞 접시에 시뻘건 국물을 올리는 ‘친절’을 베풀자 요셉은 버럭 화를 낸다. ‘어류의 골격구조를 면밀히 계산하여 신중히 뼈를 발라낸 결과 드디어 생선의 하얀 살점이 드러나는 순간 그 위를 무식한 뻘건 국물이 덮어버렸다’는 것. 요셉은 쐐기를 박는다. “배려와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야말로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진정한 헌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은희경이 2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장편의 결정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은희경은 지난해 지인에게 매운탕 국물을 퍼주다가 실제 비슷한 일을 겪었고, 한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던 소설의 물꼬가 트였다고.

얘기의 중심은 소설가 요셉과 그의 10년 전 애인이었던 류다. 이 사랑이 유별날 것은 없다.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한순간의 변곡점에 점차 식어가는 사랑 얘기가 한둘인가. 하지만 작가는 요셉을 현재 시점의 화자로, 류는 과거 시점의 화자로 대비시켜 남녀의 사랑, 그 전후를 흥미롭게 풀어간다. 또 요셉이 현 시점에서 류를 다시 만날 수 있는지, 과거 류가 요셉을 왜 떠났는지 등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시키며 흡인력을 높인다.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등장인물의 감정을 세밀하게 드러내는 행동과 대화에서 나온다. 특히 요셉의 독특한 성깔은 매력적이다. 정이 간다. 맛있는 생선구이집에 혼자 갔는데, 갑자기 ‘쫄쫄이 유니폼’을 입은 자전거 동호회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단체석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4인석을 혼자 자치하고 있던 요셉은 이 행동을 폭력적이라고 느낀다. 고등어구이와 갈치조림 사이에서 고민하던 요셉. 하지만 쫄쫄이들은 이를 모두 시켜 나눠 먹는다. 그 모습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는 요셉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은희경은 소설가 요셉을 통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소심하고 외로운 작가의 삶을 진솔히 그려낸다. 전작인 장편 ‘소년을 위로해줘’에서 열일곱 소년의 성장기를 그렸던 것에 비하면 훨씬 ‘편한 옷’을 입은 듯하고, 읽는 독자 또한 편할 듯싶다.

반면 류는 섬세한 감정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낸다. 함께 여행을 떠나려고 탄 비행기에서 요셉이 채워주는 안전벨트의 ‘철컥’ 하는 소리에서 총성을 떠올렸다는 것. 여자가 사랑이 식어가는 지점을 깨닫는 표현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 싶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도 외롭다. 연인이 곁에 있어도 고독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다’고 책은 말한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들도 실은 고독한 존재들이 짐짓 ‘태연하게’ 받아들인 현실적 타협점은 아닐까.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