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니컬러스 에번스 지음·김기혁 호정은 옮김500쪽·2만3000원·글항아리
원주민 공동체 원로의 죽음은 곧 그들이 구사한 언어를 보존할 길도 사라져 버리는 것을 뜻한다. 파푸아뉴기니의 토착민 샘 마즈넵(왼쪽)은 다행히 죽기 전에 자신의 언어인 칼람어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남겼지만, 호주 원주민 팻 가보리(오른쪽)가 세상을 뜬 뒤 카야르딜드어는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글항아리 제공
세상에 수많은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처럼 여겨져 왔다. 오만한 인간이 하늘에 닿을 탑을 쌓으려다 신에게 벌을 받아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됐다는 성서의 바벨 신화에서 이 같은 인식이 잘 드러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 문제 때문에, 예부터 하나의 표준적 언어를 확산하려는 노력이 계속돼 왔다. 그러나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고유의 지식과 문화,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서로 다른 언어는 서로 다른 사고 체계를 갖는다.
이 책은 언어 다양성의 힘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들을 소개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암호 개발과 해독을 위해 세계 최고의 수학자 논리학자 언어학자들이 동원됐다. 하지만 연합군이 어떤 암호를 개발해도 일본군 암호해독 전문가들은 바로 해독해버렸다. 결국 미군은 북미 원주민 종족 중 하나인 나바호족 출신 군인들이 나바호족의 언어를 이용해 군사계획을 무선전신기로 주고받게 했다. 일본군 암호해독 전문가들은 끝내 이 낯선 언어의 암호를 풀지 못했다.
저자는 호주 원주민 공동체들의 언어를 현지 조사하면서 공동체 원로들의 장례식을 여러 차례 주재했다. 그들을 땅에 묻는 것은 곧 그들이 구사한 언어의 실체를 알아낼 기회가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을 뜻한다. 저자는 약 6000개에 이르는 전 세계 언어가 10년 안에 절반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한다. 그는 “우리가 신경 써 언어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언어는 아무 흔적도 화석도 남기지 않는다”며 “생존자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이들의 지식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일민족 국가인 우리나라는 관계없는 이야기일까. 2010년 유네스코 ‘소멸 위기 언어 레드북 홈페이지’에는 ‘제주어’가 소멸 위기 언어로 등재됐다. 제주방언이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을 가정하면 아찔하다.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가슴 아픈 탐사 보고서’라는 책의 부제만 보고 여러 언어의 드라마틱한 소멸 이야기를 기대하면 다소 아쉬움이 든다. 책은 다양한 언어의 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언어학적 설명과 비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중요한 내용임에 틀림없지만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경각심을 대중에게 일깨우려는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는 생생한 현지답사에서 건져 올린 ‘사람 이야기’가 많았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