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軍생활 하며 받은 혜택, 지구촌 어려운 이웃에게 돌려줘야죠”
40년 군 생활을 마치고 해외 빈곤국을 돕는 구호단체 회장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황의돈 전 육군참모총장. 7일 ‘2012 소통과 나눔 파트너십 페어’ 행사장에서 만난 황 전 총장은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남들을 돕는 삶에서 행복을 찾았다는 말을 그동안 많이 들어오긴 했지만 실제로 내가 체험해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행복감이 크다”면서 “많은 사람이 이런 기쁨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하지만 그는 인터뷰 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기 때문에 나설 입장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다 며칠 전 국방일보에 인터뷰 기사가 난 것을 보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게 진정한 봉사인데 남 앞에 나서는 게 쑥스럽다”는 그를 다시 설득했다. 어차피 단체를 많이 알려야 회원도 늘지 않겠느냐는 설명에 그도 수긍한 듯 보였다.
그를 만난 날은 7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2012 소통과 나눔 파트너십 페어’ 행사장에서였다. 이 행사는 국내에서 나눔 활동을 하는 28개 비영리민간단체들과 전경련 소속 회원 기업들, 특임장관실 행정안전부 등 정부관계자들이 모여 각자 해오던 사회공헌 성공사례를 공유하고 서로 도울 일은 없는지 파트너십을 강화하자는 취지로 열린 행사였다. 황 전 총장이 이끄는 월드투게더는 이날 베트남 취약계층 지원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기업의 후원을 부탁했다.
―청춘을 다 바친 직장에서 은퇴하면 누구나 한번쯤 우울증도 겪는다는데….
“전역한 지 18개월이 되어가는 데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면 손이 가슴으로 안 가고 머리로 간다(웃음). 한동안은 나도 출근할 곳이 없는 일상이 어색해 힘들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까 허무해지기도 하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다는 자책도 들었다. 아내와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말다툼도 늘었다. 이제는 내가 아침식사를 준비할 정도로 적응이 됐다(웃음).” 그는 전역 초기 소일거리를 찾기 위해 초등학생들이 다니는 피아노학원에도 등록해 난생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까지 했다며 웃었다.
―군에서 최고 직위로 은퇴했으니 오라는 곳도 많았을 텐데….
“선배들은 기업체로 간 분들도 있고 학교로 간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은퇴가 가까워 오면서 무엇을 할까 생각을 많이 했다. 이왕이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국민에 대한 봉사 아닌가. 40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했다. 국민으로부터 받은 혜택을 제대 후에 되갚아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다.”
봉사의 삶이 은퇴 후에 갑자기 결정한 게 아니라 준비해왔던 일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남을 돕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떻게 해외구호활동과 인연이 됐나.
“국내에서 보육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2004년 이라크 아르빌 자이툰부대 초대사단장으로 파병돼 이라크로 가서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삶이 처참했다. 가난과 질병, 전쟁 후유증까지 겹쳐 마음이 피폐한 것은 물론 지뢰에 손발이 잘리고 사담 후세인의 화학전 후유증으로 태어날 때부터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었다. 테러 공격에 파편을 맞았는데도 그 흔한 X선 기계가 없어 등 뒤로 박힌 파편을 찾지 못해 배를 열었다 닫는 경우도 있었다. 귀국해서도 아이들 얼굴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 퇴역 직후 다시 다녀오기도 했다. 아직도 지구촌에는 이라크처럼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월드투게더와 인연이 됐다.”
“이라크에서 우리가 얼마나 잘사는 나라인지 새삼 느꼈다. 나뿐 아니라 젊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이룬 ‘한강의 기적’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 가난한 이라크 사람들이 한국의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를 사주는 모습을 보면서 자부심도 컸지만 ‘저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구나, 저들을 우리 상품을 사주는 소비자로만 볼 게 아니라 우리를 잘살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한국의 빈곤은 절대빈곤이라기보다 상대빈곤이다. 지금 지구촌에는 무려 11억 명이 화장실이 없어 노상에서 배설한다. 이 대목에서 우물사업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물사업?
“우리는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지만 아프리카 시골에 가면 메마른 땅에 물이 없어 여인들이 아이를 업고 아침녘에 물이 있는 곳을 향해 수km를 맨발로 걸어 저녁 무렵 물 한 동이 이고 돌아온다. 마을에 우물 하나만 있어도 많은 여인과 아이들의 삶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뀐다. 우리 돈 50만 원이면 마을에 우물 하나를 파줄 수 있다. 최근 주례를 선 적이 있었는데 답례로 캄보디아 시골에 우물 파주는 기부를 받았다. 얼마 후 마을 주민들이 신혼부부 이름이 새겨진 우물 앞에서 환하게 웃는 사진과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신혼부부 역시 기뻐하며 ‘앞으로 늘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고 나 역시 정말 행복했다.
―봉사의 삶을 택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오히려 도움을 주는 자신들이 더 행복하다고 하던데….
“실제로 정말 그렇다. 밖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감이 크다. 미국의 심리학자들이 행복의 조건을 연구한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는데 부(富)나 건강 아름다움 명예를 뛰어넘는 행복의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자부심과 나눔이었다. 특히 남에게 뭔가를 나눠줄 때 인간의 뇌에서는 춤을 출 때 느끼는 기쁨에 버금가는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나의 경우만 봐도 요즘 매일 듣는 말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이다.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나.”
―월드투게더는 어떤 단체인가.
이라크 어린이와 함께 이라크 아르빌 자이툰부대 초대사단장 파병 시절, 현지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들과 함께 한 황 전 총장. 모래바람과 강한 햇빛 때문에 선글라스를 썼다. 황의돈 씨 제공
황 전 총장은 “앞으로 6·25 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참전국들과 동티모르 이라크처럼 한국군이 파병돼 평화유지활동을 했던 국가들로 지원영역을 넓힐 계획”이라고 했다.
―남들한테 ‘도와 달라’고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솔직히 쉽지는 않다. 우리 국민도 이제는 지구촌의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가 됐다고 생각은 많이 하는데 선뜻 지갑을 열지는 않는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도 부족하다. 이와 더불어 구호단체에 대한 불신도 크다. 내가 힘들게 벌어 기부한 소중한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 혹시 단체 운영비로 지나치게 많은 돈이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들이다. 이는 나눔 활동을 하는 많은 단체가 새겨들을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월드투게더’는 조만간 활동가 인건비까지 포함해 단체의 수입과 지출을 월별로 상세하게 공개할 계획이다.”
―무보수로 일한다고 들었다.
“남을 위해 일할 기회를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
“사실 나보다 아내가 더 남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다. 15평 군인아파트에 살 때도 어려운 이웃이나 밥을 굶는 아이가 있으면 지나치지 못했던 사람이다. 큰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급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년 내내 도시락을 따로 싸주기도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나마 사회에 환원하고 아이들에게는 전혀 유산으로 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아직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해 자존심, 체면 생각에 더 많은 후원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며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겸손하게’라는 주문을 건다”고 했다.
보통 주변에서 기자가 만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은퇴 후 삶은 자족적인 삶인 경우가 많았다. 황 전 총장이 선택한 삶은 그런 길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기자의 머릿속에는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은 과연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라는 오래 묵혀놓았던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 황의돈은 누구
육사 31기로 군문(軍門)에 들어와 국방부 대미정책과장, 합참 전략정보과장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한 뒤 5군단 참모장, 국방부 대변인, 정보본부정보융합처장 등을 역임했다. 30사단장을 하던 중 자이툰부대 초대 사단장으로 파병됐다. 이후 합참 작전기획부장, 11군단장, 국방정보본부장을 지냈으며 대장 진급 후에는 연합사 부사령관과 제41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 자이툰부대 ::
2004 년 2월 이라크 아르빌로 파병된 평화재건사단. 사단사령부와 2개 민사여단, 직할부대 등을 포함해 총 3600여 명이 파병돼 베트남전 이후 최대 파병이었다. 26개 파병국 중 규모 면에서도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컸다. 베트남전 파병은 무기 제공에서부터 작전지휘까지 모두 미국이 수행한 전쟁이지만 이라크 파병은 우리 군 사상 처음으로 육공군 합동 부대에 물자, 수송, 작전책임 등을 독자적으로 수행한 첫 작전이었다. 황 전 총장은 “쿠르드 사람들이 외국 군대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여론을 듣고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애를 썼다”며 “당시 동아일보가 대한축구협회 지원을 받아 축구공 5만 개를 보내준 게 축구를 좋아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며 고마워했다. 자이툰부대의 활동은 이라크 다국적군 사령부(바그다드 주재)가 ‘자이툰부대처럼 작전을(Zaytun―like operation)’을 모토로 내걸었을 정도로 유명했으며 ‘현지 주민의 마음을 사야 테러로부터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자이툰 작전 사례는 이후 미국 대테러작전의 교리로 채택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