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그을린 사랑’ ★★★★
연극 ‘그을린 사랑’은 출생의 비밀을 풀기 위한 쌍둥이 남매의 여정을 통해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사랑의 위대함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명동예술극장 제공
동명 영화로 먼저 이름을 알린 ‘그을린 사랑’(김동현 연출) 연극 중반에 등장하는 대사다. 대사의 주인공은 오랜 세월 종교분쟁으로 병든 중동의 한 나라에서 태어나 기구한 인생을 산 여인 나왈(배해선)이다.
나왈은 열여섯 나이에 소꿉장난 같은 사랑으로 아들을 낳는다. 문제는 아기 아버지가 이교도였다는 점. 아기 아버지는 “우리 함께 있으니 모든 게 나아질 거야”란 말을 남기고 살해당하고 아들은 보육원에 버려진다. 나왈은 보육원으로 보내기 직전 아기에게 맹세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언제나 사랑할 거야.”
그렇게 함께 길동무가 돼 나왈의 아들을 찾으려고 방방곡곡을 떠돌던 두 여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극을 목격한다. 사우다는 그 끔찍한 살육에 대한 무차별적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나왈은 그런 분노로는 거미줄 같은 원망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며 딱 한 사람, 그 범죄의 최종 책임자를 처단하는 데 목숨을 던지겠다고 말한다.
영화에선 그 결행의 과정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연극에선 딱 두 방의 총성으로 이를 대신한다. 하지만 그 총성이야말로 이 작품 전체를 길게 관통한다.
연극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면 나왈은 캐나다로 이민 온 60대 노파로 이미 숨을 거둔 상태다. 이야기는 숨을 거두기 전 5년간 침묵 속에 자폐된 삶을 산 나왈이 쌍둥이 남매 시몽(김주완)과 잔느(이진희)에게 남긴 두 장의 편지에서 시작한다. 첫 편지의 수신자는 죽은 줄 알았던 그들의 아버지이고, 둘째 편지의 수신자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그들의 형·오빠다.
두 방의 총성, 두 명의 남매, 그리고 두 통의 편지. 레바논 출신의 캐나다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는 추리극의 형식을 빌려 이렇게 작품 곳곳에 숨겨 놓은 2라는 숫자가 1이라는 숫자로 전환하는 순간의 엄청난 폭발력으로 관객을 윤리적 진공상태로 몰아넣는다.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죄와 벌이 하나로 연결된 부비트랩처럼 터져버리면서 시작과 끝에 대한 감각을 잃게 만든다.
그 많은 부분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영화와 달리 연극은 그 먹먹함을 시적인 대사로 풀어낸다. 마치 맑은 물 속에 풀려가는 잉크처럼. “울고 있는 건 내가 아냐, 모르겠니? 네 인생이 죄다 네 뺨 위로 흐르고 있어” “사람들은 나한테 세상을 보여줘. 근데 그 세상은 벙어리야. 인생은 흘러가는데, 모든 게 흐릿하기만 해” “내 양심은 밤처럼 어둡고 차가웠어요. 그 목소리가 내 영혼 속으로 눈더미처럼 밀려들었죠”와 같은 대사들이다.
모래사막 속 암석과 도시의 콘크리트 기둥, 그리고 의자들이 뒤섞인 무대는 배우들의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이 교차하는 스크린이 된다. 그 스크린 속으로 투영되는 것은 또렷한 영상이 아니라 의문과 비탄에 젖은 음성들이다.
3시간이 넘는 이 연극의 초반부, 등장인물의 청소년기를 연기하는 젊은 배우들의 화술은 이를 감당하기에 요령부득이다. 연기 톤이 들쑥날쑥한 것도 관객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 극의 진가는 화술이 출중한 이연규 남명렬 배해선 등의 중견배우들이 등장하는 후반부에 빛을 발한다. 이를 잔잔한 음향과 깔끔한 선율의 음악으로 뒷받침한 정재일 음악감독의 선곡도 빛났다.
: : i : : 7월 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2만∼5만 원. 1644-2003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