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속도의 경쟁 속에서 살고 있고, 뛰기를 강요받고 있다.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에게 조로(早老)의 시대를 살게 한다. 잠깐의 여유도 견디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억압하는 속도의 굴레가 늙음을 재촉한다.
이런 조급증을 반영한 소위 SNS라 부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는 시대의 흐름이 되었고 소통의 첨단 방법이 됐으며, 돈벌이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 나에게 그 흔한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을 하지 않는다고 핀잔 섞인 불만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진정한 소셜 네트워크는 내가 당신의 눈을 바라보고, 당신의 말을 들으며 당신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교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시대 편리한 문명의 통신수단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현실인 것 같다.
모든 예술의 창조자들이 그러하듯 나의 보석 장신구들도 자연과의 교감, 사람과의 교감이 최고의 주제가 된다. 이런 창조의 예민함을 내려놓는 휴식의 대상 또한 자연과 사람이기에 불같은 창조와 물 같은 휴식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교감을 통한 창조와 휴식의 반복 속에서 자연에 대한 동경은 나를 보석디자이너이면서 원예사가 되게 했고, 숲해설가가 되게 했으며 유기농업 기사로 만들어 주었다.
숲해설가가 되기 위해 서울 홍릉 숲을 자주 찾은 적이 있다. 1년 넘게 숲을 관찰하면서 금강소나무를 만났고, 그 금강송 아래에서 계절의 변화를 살피고, 솔 향을 만끽하고, 등을 기대기도 하고, 말을 걸기도 하며 이 ‘얼짱, 몸짱’ 소나무와 나는 친구가 됐다. 나무 아래에서 느끼는 휴식의 기쁨은 세상 어느 것보다 안락하고 윤택하며 평화롭다. 사람과 나무가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교감의 시간 동안 나무친구가 나에게 준 자연의 메시지가 있다. 언제나 찾아가는 키 큰 금강소나무 아래에는 수없이 많은 말라죽은 나뭇가지가 나무 주변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나는 그 나무가 스스로 가지치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멋지고 근사한 나무의 수형을 갖기 위해, 건강한 모습으로 태양의 양기를 마음껏 흡수하기 위해 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만들어낸 가지를 말라 죽여 가며 태양이 가는 방향으로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멋진 모습의 수형을 갖게 되고 훌륭한 재목으로 커 궁궐의 기둥으로 천년을 살고, 한없이 아름다운 가구로 다듬어져 오백년을 산다는 생각을 했다.
나무는 나에게 말한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한다. 힘들고 안타깝게 자신이 만들어낸 욕심의 가지를 스스로 말라 죽여야 하는 아픔을 아느냐고 말한다. 나무가 가진 자연의 조화와 균형이 사람인 나에겐 내적인 평화라는 교감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친구가 되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해탈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길에서 만나는 작은 생명이 전하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며,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느리고 평화로운 지혜를 배우고 함께 나누는 행복한 숲 사람이 되고 싶다.
홍성민 보석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