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의 핵심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도선사 포대화상과 주지인 선묵 혜자 스님.
그렇다. 부처가 되는 건 이적이나 설법이 아니라 얼마만큼 소유로부터 자유로운지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많이 벌어서 많이 베풀면 좋지 않겠냐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증여의 핵심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유에 대한 탐착에서 벗어나는 ‘길(혹은 지혜)’을 여는 데 있다. 하여 역설적이게도 무소유보다 더 큰 증여는 없다. 포대화상이 바로 그런 경우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건만, 또 끊임없이 비우고 또 비웠건만 이토록 태평할 수 있다니. 증여 또는 무소유가 인간의 원초적 본능임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교환과 소유는 몸을 경직시키고, 관계를 단절시키고, 삶을 잠식해버린다. 이에 반해 증여는 근육과 표정을 이완시킨다. 낯선 관계를 친숙하게 만들고, 일상의 현장에 생기발랄함을 부여한다. 교환은 차갑고 탁하지만 증여는 따뜻하고 투명하다. 사람들의 길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힘도 거기에서 나온다.
버블 경제가 문제인 건 무엇보다 이 ‘증여 본능’을 차단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하도 소유와 증식의 망상을 주입당하다 보니 사람들은 증여가 더 근원적인 욕망임을 망각하고 말았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웬 증여?’ ‘증여는 부자들이 세금 면제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하는 짓일 뿐’ 등의 불신과 냉소가 골수까지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증여는 희생이나 베풂 이전에 인간의 보편적 특권이다. 선택이나 취향이 아니라 윤리적 필연이다. 왜냐면 그것이 곧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에 따른다면 생명은 초신성의 증여로부터 시작됐다. 아무런 조건도, 보상도 없는 절대적인 증여. 어디 그뿐인가. 태양 또한 아무 대가 없이 빛과 에너지를 선사한다. 말하자면 생명과 존재는 그 자체로 증여의 산물인 셈이다. 고로 이 증여 본능을 일깨우지 않고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요원한 일이 아니다. 일상의 현장 그 가까이에 있다. 포대화상이 그런 것처럼.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