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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송평인]임수경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아는가

입력 | 2012-06-16 03:00:00


송평인 논설위원

흔히 사상의 자유만큼 소중한 자유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 더 소중한 자유가 있다. 거주 이전의 자유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은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가르쳐준 것은 뜻밖에도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독일 개신교 신학자였다.

동독 주민의 ‘떠나겠다’와 ‘남겠다’


2010년 프랑스 특파원 시절 파리 7구의 미국인 교회에 초청된 몰트만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독일 신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꼽히는 몰트만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사상의 자유 이전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었다. 거주 이전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그 사상을 지키는 긴급피난(緊急避難)적 성격을 갖고 태어났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의 보편적 통치가 무너지고 개신교로 개종한 제후가 등장해 황제와 갈등을 빚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는 황제가 아니라 제후가 결정한다는 화의가 성립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는 신민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후가 결정하는 것이었다. 대신 신민에게 주어진 것이 자신의 종교가 허용되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권리였다. 이것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다. 신민이 제후의 종교를 따르지 않아도 되는 신앙의 자유, 오늘날 표현으로 사상의 자유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확립됐다. 영국 청교도가 국교회의 지배를 거부하고 신대륙으로 떠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가 가톨릭 군주의 압제를 피해 프로이센 등으로 집단 망명할 수 있었던 것도 최소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거주 이전의 자유는 종교 개혁 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중한 권리다. 나는 2009년 10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취재하기 위해 옛 동독 도시 라이프치히에 있었다. 동독을 무너뜨린 월요 시위가 시작된 곳이 바로 라이프치히다. 20년 전의 시위 장면이 도심 건물 벽면을 스크린 삼아 저녁 내내 반복해서 영상으로 비췄다. 시위대가 ‘우리는 떠나고 싶다(Wir wollen raus)’고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당초 시위대가 원한 것은 동독을 떠나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딱딱한 표현을 빌리자면 거주 이전의 자유였다. 이미 많은 동독 주민이 자유화의 바람으로 통제가 느슨해진 체코로, 폴란드로, 헝가리로 떠나 그곳 외국대사관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영상 속 구호는 어느 사이 ‘우리는 남아 있겠다(Wir bleiben hier)’로 바뀌었다. 동독의 진정한 위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동독에서 내보내주기만 해달라던 사람들이 생각을 바꿔 남겠다고 했을 때 단순히 출국 완화 조치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태가 다가왔다. 동독 공산당 독재가 무너졌다.

탈북자는 떠날 권리 거부된 사람


거주 이전의 자유는 한반도의 북쪽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요구되는 권리다. 살던 곳을 떠날 자유는 그 밖의 모든 자유가 거부된 인간에게 남겨져야 할 마지막 자유다. 탈북자란 다름아닌 이 자유마저 거부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것이 거부되자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이들이다. 누가 이들의 탈출을, 또 이들의 탈출을 돕는 행위를 변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사상의 자유는 본래 ‘내심(內心)의 자유’나 ‘침묵할 자유’처럼 비겁한 자유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사상의 자유는 사상을 표현하고 그 사상에 따라 살 자유를 말한다. 그것이 거부될 때는 떠나겠다는 자세다. 종북이 내심이나 침묵에 머무르는 한 아무도 위험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표현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니까 위험한 것이다. 진정한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는 종북주의자라면 비겁하게 숨지 말고 자기의 사상을 드러내던가, 그게 용납되지 않으면 그 사상을 따라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면 된다. 우리 사회는 북한과 달리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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