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 술판… 담배 문 10대 “말로 할때 가라”… 밤만 되면 ‘恐園’서울지역 하루 3건 공원 범죄… 살인-강간-암매장 사건 급증경찰 ‘공원범죄와의 전쟁
시민이 마음 놓고 이용해야 할 공원이 불청객에게 점령당해 ‘위험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14일 오전 1시 반 한 노숙인이 서울 강북구 수유동 은모루공원 간판에 자신의 거울과 수건을 걸어놓은 채 잠자고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16일 초저녁부터 술판이 벌어진 서울 용산구 동자동 새꿈어린이공원.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4월 30일 서울 신촌 바람산공원에서 대학생 김모 씨(20)를 살해한 이모 군(16)은 범행 전 공범 윤모 군(19)에게 카카오톡으로 이런 문자를 보냈다. 이 군은 경찰 조사에서 “집 근처 바람산공원에 자주 갔는데 밤이 되면 사람도 없고 폐쇄회로(CC)TV도 없는 것 같아 김 씨를 공원으로 유인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원룸 주택가 끝 고지대에 위치한 이 공원은 밤이 되면 어둠에 잠겨 주민들이 찾지 않는 곳이다. 이들이 김 씨를 살해한 곳은 공원 초입 가로등 아래였다. 아직 암흑이 찾아오지 않은 오후 8시 15분경 흉기를 휘둘렀다. 이 군은 “초저녁만 돼도 사람이 안 지나다녀 밝은 데서 죽여도 안 들킬 것 같았다”고 했다. 어두워지면 인적이 끊기는 공원의 으슥함이 이 군에게 살인의 ‘영감’을 준 셈이다.
▶ [채널A 영상]‘신촌 살인사건’ 사소한 말다툼이…
시민의 안전한 휴식처가 돼야 할 도심 공원이 강력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공원이 방치돼 발길이 끊기면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 최적의 범행 장소가 되는 것이다. 무더위를 피해 공원을 찾고 싶은 시민들은 혹시나 범죄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발길을 돌리고 있다. 외국에선 공원이 우범지대가 되지 않도록 공원 내 수목의 조밀도와 조명, CCTV 배치 기준 등을 상세히 규정하는데 우리는 무분별하게 공원만 늘려왔다는 지적도 많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동네 공원들이 범죄의 섬으로 고립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조만간 공원 치안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공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할 계획이다. 공원이 살인이나 강간, 시신 암매장 장소로 이용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14일 오전 1시 전북 전주시 평화생태공원에서는 외삼촌이 여섯 살 된 조카딸을 벤치에 눕혀놓고 성폭행을 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지난달 28일에는 50대 남성이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부산 맥도생태공원으로 옮겨 암매장한 사건이 있었다. 서울 한강 주변 공원들은 자살 카페 회원들이 집단 자살을 시도하기 전 회합을 갖는 ‘죽음의 광장’으로 활용된다.
2009년부터 지난달까지 서울시내 공원 2143곳에서 발생한 살인 강간 강도 절도 폭력 마약 방화 등 7대 범죄 발생 건수는 3618건에 이른다. 서울에서만 하루 3건의 범죄가 공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범죄의 절반은 밤에 일어나지만 낮 12시∼오후 8시에 발생한 범죄도 36.8%를 차지할 만큼 공원은 대낮에도 치안의 사각지대다.
○ 공원의 무법자들 만나 보니
서울 중구 서소문공원은 주변에 무료 급식시설들이 있어 여름이 되면 서울역 노숙인들의 ‘성지’로 변한다. 15일 오후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노숙인 김모 씨(52)와 30대 여성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김 씨가 산책을 나온 이 여성에게 신발을 던진 것. 김 씨는 운동을 하던 노인들에게도 “얼마나 오래 살려고 운동을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14일 저녁 서울 도봉구 생잇돌공원에는 교복 차림의 청소년 8명이 모여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학생 3명이 벤치에 앉아 있는 일행 한 명의 뒤통수와 뺨을 여러 번 때렸다. 기자가 ‘무슨 일이냐’고 말을 걸자 “좋은 말로 할 때 가던 길 가라”며 노려봤다. 15일 서울 금천구 쌈지어린이공원에서는 주민 윤모 씨(37)가 담배를 피우는 고교생 4명을 나무라다 싸움이 났다. 윤 씨가 집에서 몽둥이를 들고 나오자 고교생들은 욕설을 하며 달아났다. 윤 씨는 “그놈들이 가로등에 돌을 던져 계속 깨뜨리는 바람에 밤에는 아예 불을 못 켜 더 위험해졌다”며 “매일같이 몰려와 오토바이로 굉음을 내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공원에서 만난 고교생 성모 군(17)은 “PC방이나 노래방을 가면 돈 내라고 하는데 여긴 공짜고 아무도 간섭을 안 해 최고의 아지트”라고 말했다.
동네 술판으로 변질된 공원도 많았다. 15일 저녁 서울 용산구 새꿈어린이공원은 입구 30m 전부터 음식물 썩는 냄새와 술 냄새가 났다. 곳곳에서 구린내와 지린내가 진동했다. 주민들은 이곳을 ‘술 공원’으로 불렀다. 어린이용 미끄럼틀 앞에선 50대 남성 6명이 팩소주를 놓고 담배를 피우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어린이 두 명이 그네를 타고 있는데 주민 이모 씨(49)가 그 옆 미끄럼틀에서 비틀거리며 소변을 봤다. 그는 “여기(공원)는 우리 집이다. 집에서 술 마시는데 이유가 있느냐”며 횡설수설했다.
○ 각목 들고 장사하는 공원 주변 상인들
서울 중랑구 중화동에 있는 봉화공원 앞 슈퍼마켓 주인은 공원 노숙인들의 행패에 대비해 각목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새꿈공원 옆에서 음식점을 하는 임모 씨는 “인근에 사는 쪽방촌 사람들이 공중화장실이 조금 멀다는 이유로 공원 바닥에 변을 보는데 가게 쪽으로 오는 손님들이 냄새에 기겁을 하고 발길을 돌린다”며 “냄새가 심해 ‘저리 좀 가라’고 했더니 ‘불을 질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더라”라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 물빛공원 앞 포장마차는 공원 내 노숙인과 취객이 막무가내로 음식을 집어 간다. 주인 우모 씨는 “달라는 음식을 안 주면 손님들 안주 접시를 뒤엎으며 행패를 부려 할 수 없이 몇 개 쥐여준 뒤 보낸다”고 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