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유골 뵙는 순간, 영광과 회한이 물밀듯이
○ 중공군 12개 사단에 맞선 격전지
이번에 찾은 735고지는 옛 소련 유엔 대표의 휴전회담 제기(1951년 6월) 이후 약 3개월간 국군과 중공군이 격렬하게 전투를 치렀던 격전지다. 국군은 중공군에 맞서 절반도 안되는 병력으로 싸웠다. 총탄이 떨어져 백병전까지 벌였고, 언덕의 주인은 네 번이나 바뀌었다. 결국 국군은 130여 명이 전사하고 400여 명이 다쳤으며, 중공군은 1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은 냉혹한 스승’이라고 했다. 6·25전쟁 동안 한반도는 초토화되다시피 했고, 민간인을 합해 2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지는 큰 상처를 남겼다. 너무나 냉혹했던 이 전쟁이라는 스승에게서 큰 희생을 치르며 얻은 교훈이 오늘날 많이 희미해진 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당시 전사자 중에는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도 많았다. 이에 2000년 육군본부에서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전사자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2007년부터는 정부 주도하에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영구적 사업으로 추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 약 6600구의 유해를 찾았고 그중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훨씬 지나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제자리를 찾아간 고인들의 넋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찾아가본 유해 발굴 현장은 엄숙하고 진지했다. 유골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날의 처참했을 광경을 생각했다. 그리고 끝을 기약할 수 없었던 힘든 전쟁의 한순간을 넘기지 못한 어느 군인을 떠올려봤다. 필자를 포함한 일행은 그의 영면을 다함께 묵념으로 기원했다. 총성이 멈춘 지 오래인 735고지에는 오후의 정적이 흘렀다.
○ 철책선이 주는 먹먹함
훗날 우리 아이들은 서약서를 쓸 필요도, 군복을 입을 필요도, 또 어떠한 검문을 받을 필요도 없이 지뢰 없는 숲을 자유롭게 가로질러 이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두 손과 입가에 가득 물든 오디의 보라빛을 보며 서로 웃음 짓고 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도움말=15사단 공보참모 김진태 중령)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