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만나면 모두가 역사의 증언자가 되고, 능숙한 이야기꾼이 된다. 누군 공부를 잘했고, 누군 운동을 잘했고, 누군 언제 선생님께 다양한 부위를 직사하게 얻어 터졌고, 누군 여학생의 놀이 고무줄을 제일 많이 끊었고, 누군 이성에 빨리 눈을 떠 예쁜 여학생을 독과점했다는 둥…. 어떤 기록, 어떤 모함, 어떤 미확인 스캔들이 확대, 왜곡, 은폐, 축소돼 사약(?)을 받게 되더라도 걱정 하나 없는 해탈의 세계다.
언어폭력, 평생의 아픔으로 남아
이렇게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는 동창생 모임이지만 예외도 있다. 그건 상대를 놀리는 호칭이나 별명 같은 말에 얽힌 사연들이다. 무슨 대단한 음모나 악의 없이 외모를 따라 붙인 ‘돼지 코’ ‘딸기 코’ 같은 호칭도 그때의 운동장이나 교실을 넘어 마음의 상처로 남는다는 것이다. 생리적 현상으로 실례한 동료들이 꽤 있었는데, 특히 지목돼 ‘똥싸개’로 놀림을 당한 당사자는 오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인생의 희로애락애오욕을 거친 중년이 돼 만나는 파탈의 모임에서도 조심스레 토로할 정도이니 정신적 외상(外傷)의 수준이다. 말에 의한 상처는 한 대 맞아서 터진 코피를 닦아내듯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평생의 아픔으로 대인관계에서 소극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역기능을 낳는다. 의도적이든 무의도적이든 언어를 통한 폭력은 실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언어들이 갈수록 공격성 폭력성 호전성을 드러내는 것은 우려되는 현상이다. 전국 초등학생 1695명과 중고교생 435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542명의 실제 대화, 글, 통신언어 등을 조사한 결과 청소년이 사용하는 언어의 80% 이상이 욕설, 저주, 조롱을 포함하는 비속어라고 한다(국립국어원·2011년 청소년 언어실태 언어의식 전국조사). 욕설과 비속어의 사용이 95%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대선때 ‘말의 폭력’ 난무할까 걱정
12월 대통령선거로 가는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말의 폭력이 난무할지 걱정이다. 선거는 이미 출정식을 거치며 달아오르고 말의 경연은 열기를 뿜기 시작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후보자들이 이 나라와 이 백성의 행복을 위한 처방전과 묘약을 들먹이며 유혹의 나팔을 울리리라. 되도록 많은 후보가 출사표를 던지고 백가쟁명의 말을 통해 이 나라를 옹색하게 하고 아파르트헤이트의 폐해를 불러온 학연 혈연 지연 타파책을 펼쳐 보여야 한다. 우리 시민들도 후보자를 치장하고 있는 화장발보다 ‘생얼’의 진면목을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언어적 수사나 공격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비전이나 정책, 대통령의 자질을 판단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후보자를 가려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상대방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대화의 가치를 알고 공동체 구성원 간의 공유와 통합을 지향하는 말이다.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나라에 상처를 남기는 혼란한 카오스의 말이 아니다. 명료한 질서를 담은 코스모스의 말을 통해 사회는 즐겁게 진화한다.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