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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권지예의 그림읽기]게으름을 찬양함

입력 | 2012-06-23 03:00:00


줄리어스 르블랑 스튜어트 ‘게으른 오후’,1884년.

간혹 저는 무지하게 게으른 여자로 오해를 받곤 하죠. 물론 천성적으로 좀 게으르긴 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 보면 저를 소설가로 키운 건 8할이 제 게으른 천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는 무엇보다 누워있기를 좋아합니다. TV를 볼 때는 물론이고 책을 읽을 때나 심지어 글을 쓸 때조차도 나만의 누운 자세로 노트북을 다룰 줄 압니다.

저는 책상보다 침대를 더 사랑하는 작가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누워있어야 합니다.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 아침이면 일터로 또는 학교로 나가는 식구들이 저를 보며 한마디씩 합니다.

“팔자 한번 좋네! 일도 안하고 누워 뒹굴고!”

그러나 저는 명백히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 깬 맑은 순간에 하루의 모든 생각과 글의 구상이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제겐 글을 쓰면서 자판을 두드리는 수(手)작업보다는 글을 구상하며 고민하는, 누워 있는 시간이 고강도의 두뇌작업 시간이죠. 그림 속의 저 여자, 책을 읽다가 침대에 널브러진 포즈가 저랑 비슷하네요. 물론 저야 저렇게 차려입지 않고 만년 작업복인 ‘추리닝’ 차림이지만요.

제 직업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게 묻죠. “직업이 있으세요?” “예.” “직장 나가세요?” “아뇨.” “그럼?” “집에서 일해요.” “통신판매업? 아니면 과외를 하시나?” “아뇨.” “그럼…?” “그냥 가내수공업 같은….” (집에서 노트북 두드리는 수작업은 제게는 때로 가내수공업 같은 단순노동처럼 여겨지기도 하죠.) 하지만 거의 침대에서 ‘뇌작업’으로 보내는 저를 보면 누가 제 노동 강도를 알아주겠어요. 그럴 땐 가끔 억울한 생각도 들어요. 정신노동자의 슬픔 같은 것이랄까.

우리는 대체로 노동이라면 눈에 보이는 육체노동을 생각하며, 휴식이라면 당연히 몸이 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남 보기에 저는 몸을 별로 움직이지 않으며 늘 침대나 소파에서 뒹구니 만날 쉬고 노는 게으른 여자로 비치겠지요. 오죽하면 이웃집 여자가 어디가 그렇게 아프시냐고 조심스레 묻겠어요. 그럴 때면 머리에 계량기를 달아 눈금이 뱅뱅 도는 걸 보여주고 싶다니까요. 몸이 쉬더라도 머리는 늘 무슨 생각으로 삐거덕거리며 돌아가고 있으니. 생각에도 엔진이 달려있어서 돌아가는 소리라도 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예술교육에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어떻게 키우느냐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술가를 희망하는 아이들에게는 몸과 정신이 쉴 틈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책을 무조건 많이 읽는다고 반드시 작가가 되진 않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이전에 오히려 외롭고 심심한 상황이 작가로 만드는 경우도 많더군요.

그렇다고 무조건 잠만 자고, 아무 생각 없이 쉬기만 하는 것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우리는 영원히 잘 수 있죠. 진정한 휴식은 인생의 쉼표. 더 풍부한 삶을 위해서입니다. 원래 쉼표란 그 다음에 나올 멋진 말과 문장을 위해 호흡을 고르라고 찍는 것이니까요. 가끔 삶의 호흡을 고르고 쉼표를 찍어보는 게 어떠신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즈음, 오뉴월 팔자 좋은 개처럼 주말 하루쯤 모든 신체활동을 접고 TV도 끄고 책 몇 권과 침대에서 뒹굴어 보심이 어떠신지.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을 텍스트로 삼아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만의 소설을 쓰는 소설가들이니까요.

권지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