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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만난 사람/방형남]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

입력 | 2012-06-25 03:00:00

“자라나는 세대에 전쟁 극복과 나라 보전 중요성 제대로 가르쳐야”




백선엽 장군은 구순의 나이에도 또렷한 기억력으로 6·25전쟁을 회고했다. 정전 훈련으로 에어컨이 꺼져 더웠지만 생방송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넥타이를 맨 옷매무새를 흩뜨리지 않았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6·25전쟁은 참전 소년병들이 팔순을 맞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잘 모르는 전쟁’ ‘잊혀져가는 전쟁’이 되고 있다. 학교에서 똑바로 배우지 못해 6·25를 일으킨 쪽이 한국이라는 초등학생도 많고, 북에 면죄부를 주려고 ‘북침설’을 주장하다가 아귀가 잘 맞지 않자 ‘남침 유도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북에서는 전쟁을 일으켰던 김일성에 이어 아들 김정일을 거쳐 손자 김정은에게 세습 독재정권이 넘어갔다. 대남 적화 야욕도 세습이 되고 있다. 6·25는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고 나아가 통일을 달성하려면 62년 전 비극적인 전쟁을 되돌아보며 북한이 다시는 침략을 넘보지 못하도록 철통같은 안보 태세를 갖춰야 한다.

6·25전쟁 62주년을 맞아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을 21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만났다. 그는 국군 1사단장으로 첫날부터 북한군과 전투를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맞을 때는 육군참모총장이었다. 92세 노병은 회색 정장에 감색 넥타이 차림이었다. 그가 기자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사이렌이 울리며 정전(停電)훈련이 시작됐다. 에어컨이 꺼져 실내 기온이 올라갔다. 그는 기자에게 상의를 벗으라고 권유하면서도 2시간 넘게 옷매무새를 흩뜨리지 않았다.

그는 감개무량하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1128일 동안 전쟁을 했다. 거의 전 국토가 폐허가 됐고 국민은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는데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부강한 경제 강국이 됐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된 게 꿈만 같다.”

―한반도 안보상황은 여전히 불안하다. 2년 전 천안함 연평도 도발을 저지른 북한이 최근에는 남한의 언론사 좌표까지 제시하며 협박하고 있다. 국회에 종북 주사파 의원이 진출할 정도로 뿌리 깊은 국내 친북 종북 세력의 존재도 걱정이다.

“북한 정권 자체가 도발을 많이 하는 집단이다. 저들은 휴전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력 도발을 했다. 북한 정권의 속성을 잘 파악해야 한다. 김일성은 남침하기 전 남로당 당수 박헌영을 데리고 소련 스탈린에게 전쟁 허락을 받으러 갔다. 스탈린이 ‘원자폭탄을 가진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는데 남한 인민 해방이 쉽게 되겠느냐’고 묻자 김일성은 ‘박헌영이 남쪽에 깔아놓은 20만 명의 비밀당원이 있으니 염려 말라’고 했다. 그때 시작된 북한 정권과 남한 친북세력의 연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획책하는 ‘제2의 6·25’에 대비해야 한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국민 각자가 이 나라가 어떻게 민주국가가 됐는지, 이 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반공(反共)국가가 됐는지 알아야 한다.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전쟁을 극복하고 산업화를 이뤘는지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이승만 박사는 늘 ‘굴욕도 참을 수 있고 배가 고픈 것도 참을 수 있지만 나라 없는 설움은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백 장군은 6·25를 소련과 중국이 개입한 국제 전쟁이라고 규정하면서 한국이 미국과 함께 싸우고 전쟁 이후 한미동맹을 체결한 것이 오늘날 경제성장을 이룬 밑거름이 됐다고 강조했다. “전쟁은 김일성이 시작했지만 초기 10개월만 주도했고 나머지는 중공군(중국군)이 주역이었다. 중공이 병력과 무기 군수지원의 80%를 담당했고 김일성의 몫은 20%에 불과했다. 6·25가 내전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관점(觀點)이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고 남침한 것이 소련과 중국에서 나온 문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6·25전쟁에서 최고의 전투를 꼽는다면….

“3년 전쟁 중 여러 국면이 있었지만 제일 화급했던 것은 낙동강 방어 전투였다. 특히 다부동에서 적 주력인 3개 사단을 무찌른 전투가 최고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거기서 이기지 못했으면 대한민국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백 장군은 1950년 8월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이 밀리자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부하들에게 외치며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다. 불과 8%만 남은 국토를 모두 빼앗기고 패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온 돌격 명령이었다.

―6·25전쟁에서 최악의 실패로 꼽을 수 있는 전투는 무엇인가.

“우리는 전쟁 대비를 하지 않았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 북한이 언제 남침할지 모르니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며 미국에 탱크 대포 항공기를 달라고 졸랐다. 미국이 무슨 이유인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탱크 한 대, 전투기 한 대 없는 상태로 침략을 당했다. 적은 총동원 체제로 만반의 준비를 한 뒤 남침했는데 우리는 무기도 없고 병력도 부족했다. 거기다가 실수까지 했다. 국군은 북한의 남침을 예상해 장기간 비상대기를 했다. 그러다가 모내기철을 맞아 농촌 장병을 휴가 보내고 일요일인 6월 25일에는 많은 장병을 외출 외박 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6·25를 회상하면서 백 장군이 가장 목소리를 높인 대목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할 때였다. “맥아더 장군이 1차 제한선, 2차 제한선을 만들었다. 1차는 청천강, 2차는 압록강과 두만강이었다. 그때 통일이 될 줄 알았다. 10월 하순에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과 함흥에 가서 대중연설을 했다. 북한 동포들에게 ‘곧 통일이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백 장군은 1사단을 이끌고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평양은 그가 자라난 곳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개입으로 고향에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는 후퇴의 행군을 시작했다.

―한국군이 3년 뒤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겨받는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갈수록 악화되면서 전작권 전환을 다시 연기하거나 백지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미동맹을 미국에 처음으로 요구한 사람이 나다. 참모총장 시절인 1953년 5월 워싱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고려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유럽과는 동맹을 맺은 경우가 많지만 동양의 국가와는 아주 드물다(very very rare case)’고 하면서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그해 7월 미국 대표단이 서울에 와 18일간 협상을 했다. 한국은 휴전에 동의하고 미국은 한미동맹 체결, 10억 달러 경제 원조, 한국군 지원을 보장했다. 한미동맹은 서로에게 필요하다. 더욱 강화되면 됐지 약화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백 장군은 6·25 당시 상황은 물론이고 날짜와 등장인물 이름까지 정확하게 언급할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하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잊어버린다. 6·25전쟁은 특히 내가 생사를 걸고 치렀으니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거지.”

백 장군은 1920년 창간된 동아일보와 동갑이다. 그는 “평양에서 공부할 때부터 동아일보를 읽은 평생 독자”라고 말했다. 그는 동아일보 설립자인 김성수 선생으로부터 받은 편지도 소개했다. 1951년 말 2개 사단을 이끌고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에 돌입하기 직전 당시 부통령이던 김성수 선생이 한지에 붓글씨로 직접 쓴 친서를 보내왔다. “산간 오지는 치안이 유지되지 않아 국민들이 공비 때문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군경마저 민폐를 끼쳐 군의 위신도 손상되고 있습니다. 백 장군이 정예 2개 사단을 지휘하여 공비를 소탕한다 하니 안심이 되는 바이지만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들이 안심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연도 흥미롭다. 그는 결정적인 고비에서 3차례나 박 전 대통령을 도와줬다. 1949년 군이 남로당 연루자를 가려내는 숙군(肅軍) 작업을 할 때 백 장군은 정보국장이었다. 그해 초 남로당 연루 혐의로 조사를 받던 박정희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박 소령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육본에 재심을 요청했다. 처벌은 박 소령의 불명예 제대로 일단락됐다. 몇 년 뒤 군에 복귀한 박 전 대통령이 소장 진급 과정에서 좌익 활동 전력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참모총장이던 백 장군이 보증을 섰다. 박 전 대통령이 준장 시절 미국 포병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도 백 장군이었다.

“나는 그 일들이 있기 전에 박 전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 참모총장에게 올라온 장교들의 동향 보고를 보고 더는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도와줬을 뿐이다.”

박 전 대통령이 백 장군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국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군 후배였던 박 전 대통령 밑에서 1960년 예편 이후 10년간 중화민국(대만) 프랑스(유럽 5개국과 아프리카 7개국 대사 겸임) 캐나다 주재 대사를 지냈다.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시작했다. 충주비료 호남비료 한국종합화학사장을 역임하며 중화학공업의 토대를 닦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새누리당 전 대표에 대해 묻자 “현재의 정치상황은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며 비켜갔다. 박 전 대표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다고 한다.

―G2(주요 2개국)로 부상한 중국은 여전히 북한을 지원하고 있다. 중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1군단장 하면서 3개월간 휴전회담에 참여했다. 그때 내린 결론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우리 국민이 일치단결해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산업을 일으켜서 강해져야 한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또 동맹국을 잘 선택해야 된다. 우리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동맹을 맺었기에 오늘날의 기적을 이룬 것이다.”

그의 자서전 ‘군과 나’는 미국과 일본에서 번역 출판됐다. 영문판 ‘From Pusan to Panmunjom’은 한국에 부임하는 미군 장교들의 필독서(必讀書)다. 다음 달 초에는 중국어판이 나온다.

―노병(老兵)은 역사에 무슨 말을 남기고 싶은가.

“별거 없다. 나라가 잘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이 외국 국민에게 존경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잘될 거다. 우리 국민이 아주 영특하고 배우려고 하고 모든 것을 진취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6·25전쟁에서 한국군 13만7000여 명이 전사했다. 유엔군 15만4000여 명이 이름도 잘 모르던 나라 한국에서 싸우다 죽거나 다쳤다. 미국 캐나다 터키를 비롯해 참전국 16개국에 한국전쟁에서 숨져간 군인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한국의 전후(戰後) 세대들이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채널A 영상] 탈북작가 림일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엔…”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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