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답사 때 ‘국학의 기본정신’ 일깨워준 선생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1991년 여름에는 선생님을 모시고 신라 김화상의 사적을 조사하러 중국 베이징(北京)과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를 답사했다. 선생님은 블랙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대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시고는 그날 돌아보아야 할 곳을 지도나 방지(方志)에서 짚어 주셨다. 국학의 기본정신이 무엇이고 국학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를 그 20여 일 동안 전부 배웠다.
나는 1975년 서울대에 입학하면서부터 국문학에 관심을 가져 2학년 2학기 학과 배정 때 국문학과를 지망했다. 이후 언어학적 분석방법을 배우려고 국어학 강의를 수강하고, 사유 방법을 다지기 위해 철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또한 이병근 선생님과 정병욱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학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됐으며, 신호열 선생님께 나아가 매주 4일간 한문 고전을 읽었다. 한문학 결산보고서를 서둘러 작성하려 했던 김태준(천태산인)의 생각에 공감하기도 했으나 한문고전과 한문학에 독자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대학원 때 한쪽 눈의 망막이 손상됐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서여 선생님은 글을 많이 남기지 않으셨다. 주옥들은 ‘강화학 최후의 광경’과 ‘사천강단(四川講壇)’에 모두 들어 있다. 젊은 시절 연극 대본을 즐겨 읽으셨다는 선생님은 짧은 글 속에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켜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고 교감하게 만드시곤 했다. 1964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오신 뒤 1966년 9월부터 두 해에 걸쳐 집필하신 ‘예루살렘 입성기’에 기독교 성지를 돌아보시면서 선사들에 관해 사색한 내용을 적어 동과 서의 사유체계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1987년 6월 ‘회귀’ 제3집에 게재한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는 일제의 강제 합방 때 만주로 떠난 이건승이 황현의 아우 황원과 신교를 맺었던 사실을 시적으로 묘사하셨다.
서여 선생님은 위당 정인보 선생의 수제자다. 6·25전쟁 직후에는 전국의 문화재와 고전적을 몸소 조사하셨다. 문헌에 밝으셨기에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1책에 실린 ‘우세화시집’이 정약용의 저작이 아니라고 밝히실 수 있었다. 게다가 서여 선생님은 후스(胡適)와 함께 당대철학사를 다시 집필할 계획을 세우실 만큼 동아시아의 불교철학사에 정통하셨다. 후스의 방문을 기대해 선생님께서 조성하셨던 진달래 밭은 지금 연세대 본관 앞을 장식하고 있다.
나는 생전의 서여 선생님께 위당 정인보의 ‘양명학연론’을 이어 강화학파에 대한 보고서를 내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의 훈도를 받기 시작한 지 벌써 스무 해 남짓. 조만간 ‘강화학파: 실심실학의 계보’를 출판할 계획이지만, 해타를 접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