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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내 인생을 바꾼 순간]임권택 감독이 1974년 해외영화제 가던 날

입력 | 2012-06-30 03:00:00

임권택 감독이 1974년 해외영화제 가던 날
이 땅을 벗어난 순간 ‘한국적인 것’에 대한 연민이 솟구쳤다



임권택 감독은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 개회식과 폐회식 총감독에 선임됐다. 노익장이란 이런 것이다. 그는 102번째 작품으로 세상을 부드럽고 편하게 바라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지긋지긋한 한국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10여 년 동안 50편 넘게 영화를 찍으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떠나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주어진 생애 첫 외유(外遊)였다.

그렇게 바라던 기회였다. 여기 눌러앉으면 되겠다 싶었다. 돌아가는 날 잠적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노동을 하든, 무얼 하든 조금 노력하면 사는 거야 살지 않겠나…. 그런데 그런 상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다 도망치고 싶다면 그 나라에는 누가 살 것인가. 그 나라는 누가 사랑할 것인가. 불쌍한 나라, 불쌍한 사람들.’

1974년 6월 중순 어느 날, 대만 타이베이 한 공원 벤치에서 임권택(76·영화감독)은 그토록 멀리하고 싶던 그 나라를 동정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불쌍하다

1974년 6월 11일부터 15일까지 대만에서 열린 제20회 아시아영화제에 임권택은 자신의 작품 ‘증언’을 들고 참석했다. 설마 나오랴 해서 신청조차 해보지 않았던 여권은 당시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이 지시하자 바로 나왔다. ‘빨갱이의 아들’에게, 암묵적 연좌제의 족쇄를 차고 있던 그에게 여권이 나온 것이다. 정부가 제작비 6000만 원(당시 영화 서너 편을 만들 수 있던 액수)을 대고 육군 연대병력과 탱크부대까지 지원한 반공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는 했지만 여권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때 여권을 받으면서 ‘야, 이제 내가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의 삶은 숨 막히는 일이었다. 고향인 전남 장성에서 6·25전쟁 말엽인 1953년 무작정 집을 떠나기까지, 그리고 이후 우연히 영화계에 들어가 일 중독자처럼 영화를 토해내듯 찍을 때에도 그는 정신적 옥죔 속에서 비틀거렸다.

이미 6·25가 나기 전 그의 아버지는 경찰에 쫓기는 좌경 인사였다. 형사들이 불쑥 찾아와 구둣발로 집안 여기저기를 뒤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와 동생들이 나란히 앉아 아버지를 앞에 누인 채 이불을 덮고 숨기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국군의 진격을 피해 산에 올라간 또래 소년들이 밤에 내려오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좌와 우로 나뉘어 보복을 해댔다. “그때는 미쳤어. 사람들이.”

어쨌든 그는 패자의 쪽이었다. 승자도 물론 얻은 것은 없었다고 믿지만. 빨갱이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질식할 것 같았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숨죽이고 살면 누가 죽이지 않는 한은 살겠지 하는 마음도 오래 가지 못했다. 장남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집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말렸다. 몇 번이고 말리다 끝내 어머니는 “저놈 눈 좀 보소” 하고는 포기했다. 그는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갔다.

“그 시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잘 설명을 못하고 있는데…. 내가 생명을 유지하고 어디서든지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하던 시대였소.”

그런데 희한하게도 대만으로 가는 홍콩 국적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한국이 사라졌다. 들리느니 영어요, 일본어요, 중국어였다. 한국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승무원들도 한국인인 그의 일행에게 별다른 관심도 주지 않았다. 대만에 내리니 더더욱 한국은 누가 쳐다봐주지도 않는 그런 나라였다. 매사에 엄청나게 그를 짓누르던 나라의 존재가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나도 불쌍했고 한국이라는 땅도 불쌍하다고 생각한 거지. 가난하고 동족끼리 싸워서 많은 희생을 내고, 밖에서는 차가운 시선을 받고 안에서는 심한 통제를 받은 사람들이 불쌍한 거지. 그런 땅과 거기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겠다는 결심을 한 거요.”

그리고 그의 영화는 많이 달라졌다.

저급하다

어느 날 임권택은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1960년대 제작된 한국영화를 중간부터 보게 됐다. 보고 있자니 처음 보는 영화 같기도 하고 언제 한번 본 영화 같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데 아뿔싸, 자신이 만든 영화였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 정말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는데….” 하지만 영화 제목은 그의 기억에 없었다. 누가 촬영을 했고 음악은 누가 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1962년 감독 데뷔를 해 이후 10여 년 동안 만든 영화 50여 편을 그는 아주 간단히 ‘저질영화’라고 말했다. 그 필름들에 불을 싸질렀으면 좋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도 몇 번 했다. 일부 영화평론가가 1960년대 그의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고 나서 ‘걸작’도 몇 편 있다고, 1960년대 임권택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동의할 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10여 년, 그렇게 다작(多作)을 하는 동안 그는 ‘좋은 영화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뜻한 바가 있어 선택한 길도 아니었다. 부산 ‘하꼬방’ 합숙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숙식을 해결할 때 알게 된 미군용 헌 군화 판매 장사꾼들이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렸다. 영화로 한몫 잡겠다며 영화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밥은 굶지 않을 거 같아 잡역부부터 시작한 영화판 일이 의외로 재미있었고 열심히 하니 감독이 됐다.

그래서 만든 것이 “말도 안 되는 픽션을 전부 거짓으로 꾸며서 만든 흥행만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의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찍어댔다. 그저 미국영화 흉내 내기였다. “그때는 미국영화의 3류가 됐든, 2류가 됐든 그런 수준까지 내 영화의 질을 높여봐야겠다는 생각은 한 거예요.”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 계속 엇나갔다. 제작비 규모를 봐도, 인적 물적 자원을 봐도, 기술적 뒷받침을 봐도 미국영화처럼 만들겠다는 꿈은 가당치 않은 야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꿈은 접어야 했다.

“거짓말투성이 이야기를 버리고 한국 사람이 살아낸 이야기를 진솔하게 찍어내자고 생각했어요.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면 질은 미국 걸 못 따라가도, 저급한 영화일 수밖에 없어도 우리만의 개성과 재미는 살아있는 거 아닌가 했지요.”

별다른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런 ‘체질개선’의 첫 작품이 일제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전쟁을 겪어낸 한 여인의 삶을 다룬 영화 ‘잡초’(1973년)였다. 그 시기는 묘하게도 대만에서의 경험과 겹쳐졌다. 그리고 숙성의 시간을 거쳐 1980년대 들어 ‘임권택다운’ 영화들이 스크린을 장식했다.

▶[채널A 영상] “내 102번째 영화는…” 임권택 감독 인터뷰

한국적인 것

그의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년)가 인기몰이를 하자 당시 호남지역 배급망을 갖고 있던 외가 쪽 먼 친척이 그를 광주로 불렀다. 그 어른은 스물여섯 청년을 한정식 집에 데리고 갔다. 그때 말로 하면 기생집이었다. 밥과 술을 먹고 있노라니 아쟁, 가야금 같은 국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번갈아 들어와 연주를 했다. 소리꾼과 고수가 들어와 판소리 한 대목을 불렀다. “그때 내가 얼이 빠져버렸다고, 우리 음악에. 언젠가는 이걸 영화에 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 생각이 ‘서편제’(1993년)로 바꿔지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이란 자신이 어렸을 때 본,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한국이라는 땅을 생명력을 가지고 이겨내는 사람들의 생이었다. 그는 그런 한국인의 삶이 놀랍다고 했다. 당당하게 살아남은 우리가 놀랍다고 했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지만 이 나라가 망해야 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단지 불쌍하다는 그 측은지심으로 그는 한국적 인본(人本)의 세계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떠나고 싶던 나라와, 돌아가고 싶지 않던 고향과 화해한 임권택은 그의 102번째 영화를 구상 중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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