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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한 땀 한 땀… 바늘 자국 같이 남긴 그의 문화유산 순례길을 걷고싶다

입력 | 2012-06-30 03:00:00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이충렬 지음/416쪽·1만8000원·김영사




혜곡 최순우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진열된 철화문청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한국인이 외국문화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 정작 한국미를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전시와 저술을 통해 한국미의 가치를 널리 알렸다. 동아일보DB

스티브 잡스처럼 괴팍하지만 시크한 정보기술(IT) 영웅의 전기가 잘 팔리는 시대다. 가난했던 시절 성실과 끈기로 한국 박물관의 역사를 일군 인물의 ‘바른생활 교과서’ 같은 전기가 요즘 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의 이 전기는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기 어렵다. 혜곡은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베스트셀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인물이다. 1974년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올라 ‘박물관이 나의 무덤’이라는 소신대로 재직 중 별세했다. 저자는 꼼꼼한 자료 조사와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최 선생의 일생을 이야기처럼 술술 풀어나간다.

그는 박물관 사람들과 한국미술사학계가 인정하는 인재였지만 20여 년간 ‘만년 과장’에 머물렀다 고졸 학력이었던 그는 인사철이 되면 “학력을 중요하게 따지는 요즘 세상에 그게(승진이) 어디 쉽겠어? 이번에도 아랫사람이 (상사로) 오면 사표 써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57세에야 미술과장에서 학예연구실장으로 승진했고 58세 때 관장이 됐다.

혜곡은 조선미술사학을 개척한 우현 고유섭 선생을 비롯해 문화재 수집가이자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을 세운 간송 전형필 선생,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 등 우리 박물관 역사의 거목들을 스승이자 상사로 모셨고, 화가 김환기 김기창 등과 우정을 나눴다. 혜곡의 일대기는 곧 이들과의 교유사인 만큼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한국 박물관의 역사가 그려진다.

그는 고유섭 선생으로부터 글로써 우리 문화재와 한국의 미를 알리는 일이 중요함을 배웠다. 답사를 다니며 유물을 발굴하고 전시를 준비하는 일도 바빴지만 그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과 잡지에 글 쓰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시절 한국인들은 그의 글을 통해 문화유산의 가치에 눈을 떠갔다. 그는 예스러운 우리말로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글을 썼다. ‘조선의 자수병풍’이라는 글의 한 대목. “한 뜸 한 뜸의 바늘자국마다 젊은 여인들의 순정이 사무쳐 있는 조선 자수, 그리고 무슨 소망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한 절실한 마음이 오색 비단실을 줄 타고 올올이 스며든 곳.”

빙그레 웃음이 나는 인간적인 일화도 있다. 그는 1969년 전남 순천으로 불화를 조사하러 갈 때 딸에게 그림엽서를 보냈다. 버스에 탄 여러 명의 승객 얼굴을 손수 그린 것이었다. “어제는 광주에서 자고 오늘은 순천으로 간다. 아빠가 버스를 타고 신나게 달린다. 아빠 얼굴이 어느 것인지 맞혀봐.”

6·25전쟁 때 폭격을 피해 서울 국립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을 일일이 포장해 부산으로 옮기는 장면에선 급박함마저 느껴진다. 한때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수필 ‘바둑이와 나’에선 전쟁 중 자신이 피란 간 동안 빈집에서 굶어죽을 뻔한 바둑이와 재회한 이야기를 썼다. “바둑이가 머리를 기적처럼 번쩍 들고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단숨에 나에게 달려왔다…. 나도 왈칵 눈시울이 더워 와서 그를 덥석 껴안았지만 그때 바둑이도 함께 울고 있었다.”

작은 허물 하나 없는 인간이 있을까. 그의 일대기를 아름답고 모범적으로만 그린 것은 아쉽다. 그래도 책을 덮자마자 박물관이나 유적지로 달려가 선생이 그토록 예찬하던 한국미에 푹 빠져보고 싶어진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보존돼 있는 한옥 ‘최순우 옛집’(등록문화재)에서 선생의 향기를 느껴보고도 싶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도 생전에 이 집을 자주 찾았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