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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마지막 황태자’와 저팬 콤플렉스 100년

입력 | 2012-07-02 03:00:00


황호택 논설실장

송우혜 작가가 11년 작업을 거쳐 소설 ‘마지막 황태자’ 4권을 펴냈다. 그는 글을 쓰면서 고증(考證)하느라 진이 빠져 여러 차례 앓아누웠다. 이 소설은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영친왕)의 삶을 통해 바라본 조선왕조 망국사(亡國史)다. 사학자이자 소설가인 그는 왜곡돼 있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다큐멘터리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했다.

엄 귀비는 32세 시위상궁 시절에 고종의 승은(承恩)을 입었다. 민 황후는 고종이 모과처럼 못생긴 시위상궁과 잠자리를 한 것을 알고 나서 엄 상궁을 죽이려 들었다. 고종이 민 황후에게 사정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엄 상궁은 궐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민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도륙당하는 바람에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을미사변 닷새 만에 궁궐에 들어온 엄 상궁은 가마 두 채로 임금과 동궁(순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빼내 아관파천을 성공시켰다. 그만큼 기지와 배짱이 대단한 여인이었다. 엄 상궁은 44세에 이은을 낳아 치마폭 정치를 통해 후사가 없는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옹립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이은을 일본에 데려가 동화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은은 육사를 졸업하고 왕족 이본궁 방자 씨와 결혼해 일본 왕실에 편입됐다. 대한제국 왕실의 혈통에 일본 왕실의 DNA를 집어넣은 것이다. 미국의 B-29가 일본 본토를 공습할 때 육군 중장이었던 그는 “천황폐하에게 뵐 면목이 없다”고 토로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일본 군인이 돼 있었다. 해방정국에서 조선 왕실이 철저히 무시당하자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의 퇴역군인으로 쓸쓸한 노년을 보냈다.

송우혜 11년 대작의 ‘피눈물 역사 ’

19세기 말 이후 일본은 한국인에게 절치부심(切齒腐心)의 대상이자 콤플렉스의 제공자였다. 일본은 1964년에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고, 서울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치렀다.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뤘음에도 한일 간에는 24년 이상의 격차가 존재했다.

한국인에게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으로 존재했던 일본은 경제의 장기침체로 활력을 잃은 노국(老國)이 돼가고 있다. 일본의 3대 전자업체인 소니, 파나소닉, 샤프는 반도체 TV 휴대전화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에 압도당해 아예 이 부문을 한국에 내주고 다른 업종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인 미국에서 도요타는 작년 12.9%의 점유율을 차지했고 현대·기아차는 8.9%까지 따라붙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구매력평가기준(PPP)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017년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종의 외교자문 역할을 했던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소멸’(1906년) 서문에서 “조선인의 약점은 무지(無知)가 만연돼 있는 것이지만 기회가 주어지고 그 기회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된다면 생활조건이 급격하게 향상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놀라운 통찰력을 가진 헐버트마저도 망국의 설움을 삼키던 코리아가 한 세기 만에 한류를 세계로 발신(發信)하고, 정보기술(IT) 자동차 철강 조선 해운 건설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리라고 예측하진 못했을 것이다.

대중문화 한류처럼 떠들썩하지는 않지만 기업 한류가 미국 유럽 남미 중국 인도 터키 러시아 동남아에서 착실하게 뿌리를 뻗어가고 있다. 필자가 최근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는 미국 앨라배마의 주도(州都) 몽고메리 시청을 방문했을 때 토드 스트레인지 시장이 준 명함은 한쪽이 영어이고 다른 쪽은 한글이었다. 국권 상실의 치욕을 딛고 100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송 작가는 “민족적 역량이 조선왕조의 유교문화에 짓눌려 무기력해졌다”고 망국의 원인을 진단한다. 그는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보듯 춤과 노래를 즐기는 기질과 광개토대왕의 진취성이 핏속에서 꿈틀거리다가 세계화를 이룬 오늘에 발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봐야”

세계에서 국경을 마주한 나라 중에 사이가 좋은 나라는 거의 없다. 프랑스와 독일은 16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박정희 대통령은 광원과 간호사와 봉급을 담보로 3000만 달러의 경제개발 차관을 제공받기 위해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독일 프랑스의 역사를 언급한 뒤 “지도자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며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권유했다고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전 의원은 전한다. 한국은 일본군위안부를 비롯한 과거사에 대해 똑바로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역사와 독도 문제를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하지만 국가안보와 경제 현안에서는 미래를 바라보며 때로 협력을 해나가야 한다. 이제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의식을 짓누른 저팬(Japan) 콤플렉스를 털어낼 때도 됐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