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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강제북송→재탈북→탈남… 박인숙 씨의 기막힌 인생행로

입력 | 2012-07-02 03:00:00

아버지 찾아 南으로… 아들 구하려 北으로
그녀의 가족사엔 분단의 눈물이 맺혀있다




《 부푼 꿈을 안고 찾아온 땅에서 그녀는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월남한 아버지가 재력가라는 소식에 목숨 내걸고 탈북했지만 와보니 아버지는 병상에서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복형제는 그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던 때 북에서 청천벽력이 날아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부부와 손녀가 어머니의 탈북 사실이 드러나 평양에서 황해북도의 한 오지 농장으로 추방돼 전기도 없는 토굴 같은 집에서 보위부원의 철통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을 위해 강제북송과 고문 등을 이겨내며 탈북해 한국에 왔고 아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한 푼 두 푼 돈을 벌던 그녀는 절망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외롭고 병든 몸과 눈물뿐이었다.

북한으로 돌아가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연 탈북여성 박인숙 씨의 이야기다. 동아일보는 박 씨가 서울에서 노트와 수첩에 자필로 남긴 수기와 일기, 사진 등을 최근 단독 입수했다. 》

朴씨가 서울에서 쓴 일기 박인숙 씨가 서울에서 남긴 일기의 한 대목. 자신이 걸어온 삶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빈 부분은 민감한 내용으로 박 씨를 위해 지웠다.

박인숙 씨(가운데)가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에 아들 며느리와 함께 김정은의 은혜를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촬영

박 씨의 수기엔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너(아들)에게 죄 짓는 내 인생을 용서해라. 중국에 와서 아버지 만나 돈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그만 이성을 잃고 넘어왔다… 혈육을 다 버리고.” “내 아들(을) 망가뜨려 놨는데 사돈께 미안하고 며느리와 분이(손녀로 추정)에게 지은 죄, 눈물이 바다가 된다.”

박 씨는 입국한 2006년부터 아들의 추방소식이 전해진 2008년까진 자신을 희생해 아들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아들을 지옥에 둔 어머니에겐 더이상 천국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천국, 아들의 곁을 찾아 다시 떠났다. 자신이 북한 당국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아들이 복권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재입북이 아들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목숨을 내건 것이다.

수기를 보면 그의 재입북은 일각의 주장처럼 보위부의 협박에 따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수기엔 2010년부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준비했던 흔적이 엿보인다. ‘한국 자살률 세계 1위…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결과’ ‘내 집 마련 11.7년’ ‘한강 투신자살 매일 2.4명’ ‘장군님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았다’ 등 북에 돌아가 한국을 비난하고 북의 지도자를 찬양할 내용을 정리해 두었다. 실제로 그는 이번 기자회견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그의 결단 뒤에는 월남자의 딸로 살면서 북한 체제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던 개인적 과거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수기는 1950년 눈 내리는 겨울 아버지와 헤어지던 장면부터 시작됐다.

박 씨의 아버지는 광복 전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다. 광복 후 청진의과대학장이던 박 씨의 아버지는 1950년 당시 6세이던 박인숙을 등에 업고 피란길에 올랐다가 국군에 강제 징집돼 가족과 헤어졌다. 가장을 잃은 박 씨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박 씨의 수첩을 보면 ‘아버지를 잃게 한 미국’을 증오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역설적으로 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박 씨의 맏오빠는 미국에서 교수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의 아버지는 남쪽에서 국군 군의관으로 시작해 서울에서 유명 의대 학장을 지냈다. 북에 5남매를 남겨두고 온 그는 남쪽에서 재혼해 다시 2남 2녀를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에서 낳은 막내아들은 3선의 박모 전 국회의원이다.

박인숙 씨의 얼굴 사진을 보면 남북한 생활수준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1985년 북한에서 찍은 박 씨의 모습(위부터). 2005년경 탈북 직전 찍은 사진은 고생을 많이 한 듯 늙어 보인다. 하지만 2006년 서울에 온 뒤 박 씨의 얼굴에는 윤기가 흐른다.

북에 남은 박 씨의 가족은 월남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갖은 박해와 차별을 받았다. 박 씨는 학교에서 8년간 최우등생이었고 군 수학올림픽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대학은커녕 야간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음대에 가고 싶어 평양음대 학장까지 찾아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 씨는 1964년부터 함북 청진 나남제약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을 낳아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하지만 2001년 남편이 사망하고, 아들은 13년간 군 복무를 마친 뒤 박 씨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평양음대에 입학하자 박 씨는 남쪽의 아버지와 오빠를 찾아 아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해 탈북했다. 그의 일기장 첫 장에는 ‘남행열차’ 가사와 악보가 적혀 있어 남쪽으로 오려는 강한 열망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가 만난 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딸이 찾아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20여 일 뒤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 씨는 “실현가능성조차 희박한 사선의 길을 넘어 아버님을 찾아왔건만 한마디 말조차 나누지 못한 채 하늘과 땅으로 서로 갈리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이복형제를 대상으로 부친 소유의 재산분할 소송도 생각했지만 국회의원인 이복동생이 피해를 볼까봐 행동에는 옮기지 않았다고 했다.

박 씨는 서울 송파구의 한 임대주택에서 살면서 지하철 청소원, 노인 간병인 등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 지난해 2월 지하철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에 중상을 입었지만 다리를 절면서도 90세 노인의 간병을 다녔다. 외롭고 쓸쓸한 그는 고향과 아들이 그리웠다. “나는 잘 먹고 산다. 그러나 내가 두고 온 땅 공기 물 친척 거리 모두 함께 숨쉬던 것들이 다 북에 있다. 그로부터 오는 ○○감!” 그가 남긴 수첩 속 한 대목이다.

북한은 박 씨의 귀환을 ‘김정은식 은덕정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주민들의 탈북 의지를 꺾을 좋은 호재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평일에 불과 6시간 방영하는 조선중앙TV를 통해 무려 1시간 13분간 박 씨의 기자회견을 내보내는 파격을 선보였다.

북한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도 1일 그를 ‘돌아온 탕자’에 비유하면서 “극적인 인생과 더불어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는 저 화폭 앞에서 감히 누가 북 인권에 대해 떠들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장에는 아들과 딸도 함께 복권돼 참석했다. 박 씨의 모험은 그가 북한의 선전용 제물이 되면서 일단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박 씨에게 피해가 갈 우려 때문에 취재한 상세한 내용 중 민감한 대목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일성대 졸업·2001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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