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든 크든 상처를 줘 ‘나를 단련시킨 사람들’사춘기때 연모한 중학교 영어선생님, 그림보고 심하게 나무란 대학 은사님‘오늘의 나’는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
‘식물학’, 2001년. 황주리 그림
운동화의 왼쪽 오른쪽도 구분 못해 운동화에다 크레용으로 표시를 해놓던 내 모자란 어린 시절, 미술 학원에 데려다 준 어머니 덕분에 나는 늘 그림 잘 그리는 아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월요일 조회 시간마다 상을 타러 나가던 그 어린 날들은 내게 상이란 그리 즐거운 것도 아니고 벌이란 그저 아픈 것만도 아니라는 조숙한 깨달음을 주었다.
어쩌면 사랑이 틀림없을 그 감정은 모범생인 내게 변화를 가져왔다. 세상이 다 시큰둥하기 시작했고 공부는 뒷전이고 책읽기에 열중했다. 그 시절 우리는 왜 그렇게 데미안에 심취했을까? 요즘 청소년들은 헤르만 헤세가 아니라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심취할지도 모르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새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뭐 이런 문구가 아직도 또렷이 기억의 수면으로 떠오른다. 내가 고독한 영혼의 세계에 입문하기 시작한 건, 선생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마음 깊이 자리하기 시작한 때와 같이한다. 나는 미술반에 잘 들어가지 않게 되었고, 선생님을 따라 카메라를 메고 이곳저곳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일기장에는 온통 데미안과 선생님이 혼재된 형태의 글들이 씌어졌다. 그 시절 내 영혼의 친구이자 감시자이던 어머니의 눈에 딸의 일기장은 걱정스러웠나 보다. 어머니는 선생님을 가끔 집으로 초대해, 우리 집 식구는 선생님과 친척 같은 사이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가수 김현식의 노래 ‘추억 만들기’의 노래 말처럼,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천천히 식어갔다. 선생님이 결혼을 한 뒤에도, 오랜 세월 뒤 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는 친척처럼 지냈다.
얼마 전 앨범을 정리하다가 나는 그가 찍어준 내 사진들을 발견했다. 갖가지 표정을 담은, 선생님이 아니면 남아있지 않을 내 청춘의 흔적들이었다. 사진이란 참 신기하다. 누가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진 한 장이 한 개인의 삶의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 더 큰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바로 그 알을 깨고나오는 동안의 부화의 시간들은 아닐까?
이 장면에서 엉뚱하게도 미움의 감정으로 남은 대학 시절 은사님 한 분이 생각난다. 쩍하면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 앞 찻집에 죽치고 앉아 보들레르와 토마스만과 사르트르를 읽던 시절, 교수님은 언제나 내 그림을 나무랐다. 어느 해인가의 메이데이 전람회 때 콜타르를 이용한 실험적인 내 작품은 날씨가 더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다른 그림으로 바꿔 걸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네가 걸겠다고 한 그림이니까 바꿔 걸 수도 없으며, 하루 종일 지키고 있으라 하셨다. 할 수 없이 나는 며칠 동안 몇 시간 간격으로 그림을 바로 걸었다 거꾸로 걸었다 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그분이야말로 나만의 세계에 굳건히 정진하도록 도와주신 고마운 분이 틀림없다.
황주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