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연구하는 박용숙 씨의 ‘마이 웨이’ 40년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이런 주장을 ‘샤먼제국’(소동·2010)이라는 두꺼운 책은 정색을 하고 소개했다.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 고대사의 시원을 지중해에서부터 풀어놓고 있다. 주류 고대사학계에서 보면 황당하기가 이만저만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1970, 1980년대 소설가와 미술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박용숙 씨(77·사진)다.
○ 문제는 샤머니즘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신라(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가치관에 따라 행동했는지, 그들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그걸 알고 싶었지요.”
그의 생각은 샤머니즘(무속)에 가 닿았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말했던 풍류(風流)나 신선도와 맞닿아 있는 것도 결국 여기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강릉 단오제를 비롯해 전국의 무당들이 큰 굿판을 벌이는 곳이면 빼놓지 않고 다니려 애썼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같은 외국 학자들의 샤머니즘 연구서적을 꼼꼼하게 읽었다. 그렇게 10년을 한 끝에 샤머니즘이란 결국 한 무당의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탄탄한 체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바 학계에서 고등종교라 일컫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이전의 세계는 결국 샤머니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은 좀 더 이후의 일이었다.
자신의 미술평론 작업에도 샤머니즘적 요소를 집어넣었다. “미술비평을 하다보니 재미가 없더라고요. 전부 서양의 것을 복사해서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우리 시각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그는 자칭 ‘미술계의 왕따’가 돼 버렸다. 당시 한국 미술계는 서구 모더니즘의 자장(磁場) 안에 있었다. 해프닝과 퍼포먼스 미술이 여기저기서 시도됐다. 그런데 그는 샤머니즘과 노장사상으로 이를 풀이하려고 하니 시대에 뒤진 평론가로 보였다. 하지만 해프닝이라는 게 무엇인가. 결국 기존의 이성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무위(無爲)의 한 표현이 아니었던가. 자신들의 작품 카달로그에 해설해 달라는 신진 예술가들의 주문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더욱 샤머니즘에 매진했고 그 관심은 우리나라 상고사에까지 나아갔다.
○ 정신적 담론을 찾아서
삼한(三韓)이 한반도 남부에 있던 변한 진한 마한의 3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교황청과 같은 위세를 누렸던 ‘쌈지조선’의 3가지 기능을 말한다는 것. 그리고 당시 전 세계는 쌈지조선의 지위를 놓고 벌이는 쟁패의 연속이었다는 것. 그 쌈지조선이 바로 샤머니즘이라는 거대한 종교체계의 수장이었다는 것 등등 기존 상식과 지식을 비웃듯 펼쳐진다.
주류 학계가 허황되다고 비판하는 재야 사학계의 상고사 연구에 단지 숟가락 하나 더 얹으려고 그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100번 넘게 읽은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영토를 만주에서 조금 더 넓혀 보려고 중국 사서와 일본의 고대사 연구서적을 훑다시피 읽어낸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정체를 구성하는 정신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중국은 중화사상이라는 게 있고, 일본은 신토(神道)사상이라는 것이 자신들 역사관의 뼈대를 이루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뭔가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몫, 우리 역사라는 것의 정체가 뭐냐는 거지요. 뭔가 정신이 (그 안에) 있어야 할 텐데 없다는 겁니다. 기존 역사학계는 논쟁만 있지 그런 정신에 대한 담론은 없다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죠.”
그는 자신이 ‘샤먼제국’에서 전개한 ‘샤머니즘 제국으로서의 민족사’라는 논지가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실증적 자료와 객관적 증거를 토대로 하는 실증주의 주류사학에서 보면 코웃음을 칠지 모를 작업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구가 우리 고대사 해석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다른 모델들도 어서 나와서 논쟁과 공박만이 아닌, 고대사에 대한 새 문명론이 갖춰지는 발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의 연구가 실증적으로 입증될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팔순을 눈앞에 둔 그는 대입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학생처럼 책과 자료와 씨름하고 있다. 그런 노력을 누가 폄훼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