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남자는 출장 중이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폭행을 당해 병원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남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는 휴대전화 메시지를 확인하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해 잠든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니 눈과 코에 멍이 들고 부은 정도였다.
“무슨 그런 엄마가 다 있어? 자기네 애는 잘못이 없고 우리 애가 시비를 걸었다는 거야.”
남자가 아들만 한 나이였을 때에도 그런 녀석들이 있었다. 반항심에 혹은 거들먹거리는 맛에 요란하게 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불행이었다. 불과 열몇 살에 인생의 정점을 찍고 그 이후로는 줄곧 내리막길을 탔다는 게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전성기를 일찍 맞이한 것만 한 불행이 없다’는 진리는 소년등과(少年登科)만이 아닌 것이다.
“아까 다친 것을 봤을 때는 화가 많이 났는데, 지금은 ‘우리가 애를 잘 키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드네. 옳은 일을 위해서 용기도 낼 줄 알고.”
아내의 말에 남자도 가슴이 뿌듯해졌다.
녀석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게 어떤 건 줄 알겠다. 아들놈만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잘 살지 못한 죗값을 이렇게 치르게 되는구나.”
인생은 상상보다 잔혹하다. 잘못 살아온 세월에 대한 앙갚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첫 번째 앙갚음은 과거의 잘못이 만든 고통스러운 현실이며, 두 번째는 자식에게 이어지는 ‘인생유전’이다.
부모 된 마음에선 두 번째가 끔찍하게 아프다. ‘너만은 잘되길’ 바랐던 기대는 간 곳이 없고, 아이가 가슴에 박은 대못만이 처연히 남는다. 더구나 자신이 걸어온, 후회로 점철된 길을 아이가 똑같이 걷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아픔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한상복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