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평론가·소설가·평택대 교수
TV드라마 보면 낭만적 환상 가득
향내 나는 촛불 하트를 만들고 꽃다발을 준비한 채.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고 와인 잔을 부딪치면서. 여친을 위해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선물을 준비하며. 100일과 200일을 기념하면서. 미니 밴을 타고 남산을 드라이브하면서. 프러포즈는 공개적인 것이어야 하기에 여성들은 깜짝 이벤트와 감동의 프러포즈를 기다리고 있다. 사랑의 SNS는 하루 종일 도시의 혈관을 타고 수도 없이 공중으로 날아다닌다. 미니홈피에는 매일같이 새로운 커플 사진과 커플 일지가 공개된다. 연애는 도시문화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도시문화의 경품 혜택과 소비를 위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텔레비전은 다양한 짝짓기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인기리에 방영되는 ‘우리 결혼했어요’(약칭 ‘우결’) ‘짝’ ‘러브 스위치’라는 프로그램. ‘연애’는 세련되고 화려한 ‘도시 문화’를 만끽하게 한다. 낭만적 환상을 소비하게 한다.
꽃중년 4인방이 햇빛이 잘 드는 카페 유리창 앞에서 파스타와 브런치를 먹을 때, 그들의 까칠함과 섬세함과 배려가 장난스러운 수다나 달콤한 연애로 이어질 때, 우리 시대 연애는 그야말로 ‘시대의 로망’이 된다. 경제적 전문적 능력과 완벽한 외모와 화려하고 세련된 매너 그리고 소품들. 드라마에서 연애는 우리 시대 현대인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나르시시즘을 만족시켜 준다.
현실엔 돈-학벌없는 ‘찌질남’넘쳐
“엄마, 나, 저런 남자와 결혼할래!” 사춘기를 막 지난 딸은 드라마를 보며 내게 말한다. 그럼 나는 다부진 말로 대꾸한다. “저런 남자는 드라마에만 있는 거거든. 꿈 깨!” ‘그래봤자, 결혼하면 지지고 볶고 아내는 잔소리가 늘고 남편들은 퇴근하면 집 들어가기 싫어할 게 뻔한데…’ 하는 말을 나는 애써 목구멍으로 삼킨다. 그렇다면 나는 딸아이에게 드라마 ‘신사의 품격’과 함께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멋진 허구’로라도 현실의 남루함을 덮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일까, 고민한다.
로맨틱 코미디는 발랄하고 화려한 로맨스를 보여준다. ‘시크릿 가든’ ‘파리의 연인’ ‘최고의 사랑’. 그 전에는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커피프린스 1호점’이 있었다. 재벌 2세가 사극으로 가면 왕으로 등장한다(‘해를 품은 달’). 까칠하지만 로맨틱한 재벌 2세, 시크한 라이프스타일과 감각적인 대사. 그들과 단 한번이라도 사랑에 빠진다면. 여성들의 사춘기적 낭만적 환상은 스크린 위에서 잠들 날이 없다.
이를테면 현실에서 대형마트의 피자와 치킨은 얼마나 ‘착한(?)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지. 왜 베이커리 체인점과 커피 전문점까지 영업 확장을 하고 있는지. 중소기업과 하청업자들이 얼마나 재벌기업에 쩔쩔매며 그들의 생명을 담보 잡히고 있는지. 현실 속의 ‘까도남’들이 얼마나 실제로 ‘까칠하게’ 장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왜 우리는 침묵하는가. 왜 드라마 속 ‘까도남’들은 언제나 스마트하게 잘 생겼는지. 이윤추구를 위해 강제 인수합병하는 이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여자를 위한 사랑의 로맨티시스트가 되는지. ‘명품 백’ 선물은커녕 돈도 학벌도 제대로 없는 ‘찌질남’들은 어쩌란 말인 것인지. 정규직 보장도 받지 못한 20대가 수두룩하기만 한데. 스크린은 허구에서라도 끔찍한 현실에 지친 현대인을 거대한 환상으로 위무해주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24시간 편의점 알바생의 최저 시급은 아직도 458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