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숙 씨의 문학적 감수성과 다재다능한 면모는 수기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월남자의 딸에겐 이런 재능은 고뇌의 깊이만 더할 뿐이었다.
“○○가 집에 왔었다. ‘걜 공부시켜 성공 못합니다. 체육을 시키시오.’ 나는 도(道) 스케이트 대회 인민학교(초등학교) 속도경기(스피드스케이팅) 500m 부문에서 공화국(북한) 기록을 세우며 1등을 했다. 친척들은 ‘신금단(북한 여자중거리육상 스타)이는 체육을 너무(많이) 해서 아이를 못 낳는다’며 (나에게도) 체육을 그만하라고 했다.”
사실 박 씨의 천부적 재능은 음악 분야에 있었다. 그는 최승희무용학교 음악과에 추천을 받았다. 하지만 출신 성분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아들이 여섯 살 때 음악선생이 바이올린을 배워(가르쳐)주었다. 나는 말렸다. 나처럼 가슴 아프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닮아 청음 능력이 남다른 것이 선생으로 하여금 (아들 음악교육에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금성고등에 추천받았으나 외할아버지 문제로 불합격됐다.”
박 씨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았다. “군대에 보냈다. 제대군인증과 당원증이라도 있어야….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군에서 보내야 했다.” 그 덕분에 아들은 어머니의 꿈이었던 평양음악대학을 나온 뒤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박 씨 자신은 한국에 온 뒤에야 음악을 통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세계(정상)급 오페라단과 교향악단의 연주를 보면서 아들을 생각했다. 꿈만 같았다. 음악을 사랑하는 동료들과 외국 음악이 들어 있는 카세트를 듣다가 곤욕을 치렀던 나는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수기 앞부분에는 박 씨 필체의 노래 가사와 악보들이 적혀 있다. 한 음악전문가는 “음표 표기가 전문가 솜씨”라고 평가했다. 박 씨는 자신의 탈북으로 촉망받는 음악가에서 추방돼 농민이 된 아들에게 견디지 못할 죄책감을 느꼈다. 결국 박 씨는 아들을 살리려고 재입북을 선택했다. 그런 박 씨의 마음속엔 아들을 통해 음악가의 꿈을 대리 실현하려는 모성애가 깔려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