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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공옥진 씨 향년 81세로 별세

입력 | 2012-07-10 03:00:00

해학의 춤-소리로 한 시대 풍미한 ‘창무극 명인’




“무대에서 열심히 춤추다 죽게 되면 여한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공옥진 여사의 마지막 공연. 고인의 1인 창무극 레퍼토리 중 심청가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 고되고 한 달 뒤인 2010년 6월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한국의 명인명무전’ 무대에 올라 살풀이춤과 심청가 한 대목을 펼쳐 보였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한국 전통 소리와 독자적인 춤을 엮어 만든 ‘1인 창무극’으로 나라 전체를 웃기고 울렸던 광대이자 예인(藝人) 공옥진 여사가 9일 오전 4시 52분 전남 영광기독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의 인생은 TV 드라마, 영화, 책과 다큐멘터리, 시로 다뤄질 만큼 파란만장했다. 전남 순천(승주)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고인은 7세 때 어머니를 잃었고 8세 때 아버지가 일제에 의해 징용되면서 4남매가 흩어졌다. 일본에 있는 무용가 최승희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 어깨 너머로 춤을 배웠다. 천신만고 끝에 귀국해 7년 만에 만난 부친에게서 소리를 배우고 18세 때 고창 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했다.

6·25전쟁 때는 경찰관과 결혼한 사실 때문에 인민군에게 죽음을 당할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33세 때 구례 천은사에 입산해 한동안 비구니로 살기도 했다. 환속한 뒤에는 영광 대천면에 정착해 살면서 장터에서 선보인 춤과 토막 창극이 입소문을 타며 1978년부터 대중 앞에 서게 됐다.

당시 40대 중반의 나이에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공연에서 선보인 ‘병신춤’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고인은 1982년 6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응어리진 가난과 벙어리 남동생, 내가 낳은 꼽추 딸의 한을 풀기 위해 병신춤을 추었지요.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오장육부에 서린 한을 춤으로 승화시켰다고 할까요”라고 밝혔다.

고인은 이후 동물 동작을 흉내 낸 동물 춤, 고전을 토대로 새롭게 각색한 심청전과 흥부전 같은 창무극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재래시장 광장부터 미국 뉴욕 케네디센터(1981년)까지 국내외 다양한 무대를 지켜왔다.

무대 밖에서 고인의 삶은 기구했다. 1998년에 이어 2004년 뇌내출혈로 두 번째로 쓰러졌고 교통사고까지 당해 무대에 오랫동안 서지 못했다. 2007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매달 43만 원으로 생활해 왔다. 춤과 소리를 아우른 명인이었지만 창무극이 ‘전통 계승이 아니라 창작’이라는 이유로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해 제자들도 하나둘 떠났다. 2010년 ‘창무극 심청가’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마침내 지정 예고됐을 때 “맺힌 한을 풀었다. 죽어도 원이 없다”며 국립극장 ‘한국의 명인명무전’ 무대에 선 게 마지막 무대가 됐다.

전남 영광 농협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는 9일 이른 아침부터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 강창희 국회의장,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 홍사덕 박근혜의원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등 정치인들이 보낸 조화가 가득했다.

무남독녀인 김은희 씨(64)와 손녀 김형진 씨(41)가 유족으로 조문객을 맞았다. 공 여사의 유일한 전수자인 한현선 씨(47·여)는 “선생님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끔 전수관을 찾아 문하생들을 지도하는 열정을 보이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걸그룹 2NE1의 멤버 공민지 양(18)도 고모할머니인 공 여사의 빈소를 찾아 울먹였다. 발인은 12일 오전 9시, 장지는 광주 원효사. 장례는 영광문화원 주관 문화인장으로 치러진다. 061-353-0444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영광=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