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셔츠+검은 바지’ 개성 잃은 직장인 여름복장… “조직문화 틀 못깨”
9일 점심시간을 맞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에서 밝은 색 셔츠에 짙은 색 정장바지를 입은 남성 직장인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무늬 들어간 거 입으면 왠지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아서요.”(A회계법인 이모 차장)
“업무상 미팅이 많아 사람들에게 부담 안 주려면 이게 제일 나아요.”(H해운 심모 대리)
○ 천편일률적인 ‘쿨비즈’ 바람
서울시가 최근 에너지 절감을 위해 반바지 착용을 권장하는 등 ‘쿨비즈(Cool-Biz)’ 운동을 시작했다. 일부 기업은 몇 년 전부터 복장 자유화를 도입했다. 하지만 직장 남성의 복장에는 별 변화가 없다는 게 의류업계의 분석이다. 삼성패션연구소가 지난해 제일모직 계열사가 판매한 남성 드레스셔츠의 색상을 분석한 결과 흰색과 파란색이 각각 73.7%와 13.4%를 차지했고 회색 등 기타 색상은 12.9%에 불과했다.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 ‘갤럭시’ 매장에서 근무하는 박재상 매니저는 “요즘 쿨비즈란 말이 유행하지만 실제 고객의 소비 패턴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봄과 가을에는 셔츠 위에 다양한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어 약간의 차별화가 가능하지만 셔츠와 바지만 입는 여름이 되면 출근 패션의 획일성이 더욱 부각된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처럼 청바지에 터틀넥 셔츠를 입거나 말단 직원들이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회의하는 모습은 아직 먼 나라 얘기인 것이다.
남성의 옷차림이 정형화돼 있다 보니 의류업체들은 흰색이나 푸른색 셔츠와 검정색 남색 바지 등 ‘기본형 상품’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국내 남성 고객은 여전히 무난하고 남들이 많이 입는 옷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상품 기획을 할 때 기본 스타일의 물량을 70% 이상 준비하고 나머지는 유행을 고려해 색상이나 체크무늬로 차별화한다”고 설명했다.
직장 남성들의 천편일률적인 ‘드레스코드’가 깨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나 혼자 튀면 손해 본다’는 내면화된 집단주의를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패션에 무감각했던 기성세대가 만든 무형의 복장 기준에서 일부 직원이 이탈할 경우 다수가 불편해하고 그런 시선이 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한림대 사회학과 유팔무 교수는 “다수 안에 묻혀있을 때 안전함을 느끼는 게 한국 조직문화”라며 “개성이 강한 젊은이들도 어렵게 취업하기 때문에 직장 내 복장문화를 ‘2차 사회화’로 여기고 순응한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D건설에 입사한 윤모 씨는 “회사에서 흰색이나 파란색이 아닌 다른 셔츠를 입으면 조직 융화에 악영향을 주는 느낌이 든다”며 “상사가 지나가면서 ‘요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넌지시 얘기하면 왠지 불성실한 사람으로 비칠까 봐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남들이 많이 입는 옷은 대충 입어도 중간은 간다는 안도감도 남성 직장인의 새로운 시도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여성에 비해 쇼핑에 관심이 적은 대부분의 남성은 몇 벌만 가지고도 한 계절을 보낼 수 있는 옷을 선호한다. 자주 입어도 스스로 질리지 않고 ‘옷을 못 입는다’는 남들의 시선을 피하려면 주변 동료들과 잘 동화될 수 있는 옷을 고르는 게 안전하다는 것이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김종기 인턴기자 서강대 경영학과 4학년
김성모 인턴기자 중앙대 경제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