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주필
勝者獨食의 비극 앞에 선 MB
합산 8만1084표 대 7만8632표로 1.5%포인트 차 이명박 신승(辛勝)이었다. 순간 박근혜는 웃었다. 평정(平靜)을 잃지 않았고 표정은 명료했다. 그리고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나로 하여금 ‘박근혜, 빛났다’(2007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는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 칼럼을 다시 꺼내보았다. “박 씨는 한나라당 경선에서 석패하긴 했어도 ‘한국정치의 자산(資産)’임을 공인받았다. …그는 이명박 후보와의 박빙 승부를 통해 여성 대통령에 대한 실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정치사에서 일찍이 박 씨만큼 ‘졌지만 확실한 대주주(大株主)’는 없었다. …이번 경선까지의 정치 10년을 돌아보면서 박근혜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눈을 뜬다면 더 좋을 것이다. …‘보수(保守)의 보수(補修)’를 바라는 많은 국민이 그를 기억하고, 그를 부를 날이 있지 않을까. …”
그날 이명박은 후보 수락연설에서 “지금 이 순간부터 저를 지지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뺄셈의 정치가 아니라 덧셈의 정치를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동아일보는 ‘이명박 후보 본선의 험로’라는 이튿날 사설에서 이렇게 주문했다. “당의 화합 하나 이루지 못하는 후보라면 국민통합을 말할 자격이 없다. 한나라당은 경선 후유증으로 정권을 놓친 전과(前過)가 있다. 이긴 쪽이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유혹을 경계하면서 아량과 인내로 패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 후보는 ‘대통령 후보’ 빼고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진영은 대선 승리를 위해 박근혜를 비롯한 비이(非李)그룹을 써먹으려고만 했지, 진심으로 끌어안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이 안겨준 대선 압승을 자신들이 잘난 덕이라 착각하고, 권력과 자리를 전리품인 양 움켜쥐었다.
지난날 어느 대선에서나 승자에게 간 표는 100% 그 한 사람만 지지한 표가 아니었다. 박정희를 따르던 국민도 박정희를 비판했던 김영삼에게 표를 줬다. 이명박이 정동영보다 더 얻은 531만 표 중에는 열렬한 박근혜 지지자들의 표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이명박은 박근혜를 말로만 동반자라 했지, 실제로는 함께할 수 없는 ‘그 여자’로 여겼다. 경선 과정에서 깊어진 불신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는 얘기는 변명이 안 된다. ‘통합(統合)의 지도자’가 되지 못한 자질 부족을 증명할 뿐이다.
덧셈의 정치 시험대 오른 ㅂㄱㅎ
이명박은 국정의 고비마다 박근혜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방해를 받았다. 집권 5년의 많은 실패와 상처들은 덧셈이 아닌 뺄셈 정치의 자업자득이다. 이명박 이상득 정두언 박영준 등이 승자독식의 미망(迷妄)에 빠지지 않고 권력을 나눌 줄 알았다면, 나아가 권력을 버릴 줄도 알았다면 대통령 말고는 모두 법의 칼날 위에 서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박근혜는 어제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시간의 광장)에서 18대 대선 출마 선언식을 가졌다. 그 시간 이상득은 법원의 구속 여부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5년 사이 운명의 기묘한 엇갈림이다. 이명박 일가는 노무현 일가의 비극에서 왜 교훈을 얻지 못했는가, 이제 와서 땅을 쳐봐야 엎질러진 물이다.
5년 전에는 이명박이 역사의 새 주인공이었으나 지금은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김두관 손학규 김문수 김태호 등이 새 주인공 자리를 겨룬다. 이들은 국민에게 꿈과 행복을 안겨줄 연금술사인 양 말하고 웃고 손짓한다. 이들 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언어들은 거의 차별성이 없다. 5년 전 이명박이 ‘국민성공 시대’를 외쳤던 것과도 다르지 않다.
박근혜는 어제 연설에서 많은 약속을 했고, 무엇보다도 실천이 중요하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변화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박근혜가 이명박의 실패와 과오를 답습하지 않고 뛰어넘을지, 이를 위한 자기 변화를 행동으로 실천할지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 본인의 운명도 거기에 걸려 있지 않을까. 시간은 이제 박근혜를 시험대에 올렸다. 박근혜가 이명박을 반면교사(反面敎師)삼아 새로운 통합의 리더십을 보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이명박 이상득에게 오늘이 다가왔듯이, 안 올 것 같은 시간도 언젠가는 온다. 누가 이번 대선에서 마지막 승자가 되건 그와 그 진영 사람들 또한 ‘5년 뒤’라는 시간을 피할 수 없다. 득세할 때 위험을 투시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현자(賢者)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