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67·사회학·중민사회이론연구재단 이사장)가 독일 뮌헨 근처 슈테른베르크에 자리한 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83)의 자택을 최근 방문했다. 하버마스 교수와 한 교수 부부는 오랫동안 친분을 이어온 사이다. 한 교수는 하버마스 교수의 알려지지 않은 개인사와 소통정의론에 대해 6시간에 걸쳐 대화한 내용을 정리해 동아일보에 보내왔다. 한 교수는 2006년에도 ‘지식사회가 가야 할 길’을 주제로 하버마스 교수의 자택에서 대담을 나눈 뒤 동아일보에 글을 실은 바 있다. 두 학자의 대담을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수행하는 소통정의를 강조하며 “누구도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지 않는 포용적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상진 교수 제공
내가 하버마스 교수와 교류를 시작한 것은 1988년이었다. 1996년 나의 주도로 그가 처음 방한한 이후 상당히 친해졌다. 그래서 그와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 이번에 그의 자택을 방문한 목적은 그의 사상을 이론보다는 인간적인 터치로 조명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그의 개인적 체험을 물어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내 심영희(한양대 사회학과 교수)와 함께 지난달 26일 독일 뮌헨에서 기차를 타고 하버마스 교수의 사저가 있는 슈테른베르크로 갔다. 우리 둘은 하버마스 부부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쾌청한 날씨에 풍경도 좋아 우리는 걸어서 하버마스 교수의 집을 찾아갔다. 이렇게 간 것은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역에 도착해 전화하면 그가 차로 마중을 나왔다. 우리가 불쑥 도착하자 부인 우테 여사가 깜짝 놀라며 반겼다. “위르겐은 기차역에 갔어요. 2시에 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차! 역에서 전화할 것을! 사실은 전화하려 했으나 시골 역의 공중전화가 고장 난 상태였다. 우리가 전화도 걸지 않았는데 그가 역으로 나와 기다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 슈테른베르크에 있는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왼쪽)의 자택 테라스에서 한상진 교수가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상진 교수 제공
소통과 권력을 혼동하지 말라는 하버마스 교수는 ‘소통정의’를 주장한다. 소통정의는 분배정의, 사법정의 등과 함께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분배정의를 위해서는 유능한 정치인 또는 행정가가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좋은 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 사법정의를 위해서는 법의 정신에 충실한 법관 또는 법조인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잘못된 법 집행을 뜯어고치는 것이 필수다. 하버마스 교수는 이런 정의와 함께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수행하는 소통정의에 관심을 쏟는다. 소통정의의 진정한 주체는 정치인도 관료도 법률가도 아니고 바로 시민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 교수는 3대 원칙을 강조했다. 첫째, 누구나 배제되는 사람 없이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어떤 주장이건 관점이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상대의 말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공평한 상보성을 보장해야 한다. 소통정의의 핵심은 바로 상보성의 원칙에 있다.
그러나 권력자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말을 하는 데 바쁘고 자신의 취향대로 의제를 설정하거나 독점하려 한다. 이 때문에 하버마스 교수는 강자의 언어를 왜곡된 소통이라며 비판했다. 그 대신 그는 누구도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지 않는 포용적 소통을 강조했다. 전후 독일에서 그가 걸어온 길을 ‘좌파 자유주의’로 불렀다.
자연히 나의 호기심도 커졌다. 언어장애가 소통이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그의 학문적 성취는 타고난 실존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거둔 인간적 승리가 아닐까. 그러나 그는 겸손했다. “특별히 대단한 점은 없어요.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이들과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험의 역할을 부정하진 않았다. “나의 포용적인 소통이론에 유년기의 심층심리가 작용했다는 해석은 사실 이탈리아에서 심리학자로 일하는 나의 아들 틸만이 이미 제안했던 것입니다.”
이 대화로 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의 소통이론은 강자가 대변하는 패권적 세계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반대로 약자, 소수자, 장애인 등의 동등한 참여를 옹호한다. ‘정상인’이 이끄는 주류 소통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열린 소통, 주류에서 밀려난 타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열린 소통을 지향한다. 그러면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약자의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이론에 접목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에 그의 진정한 학문적 고뇌와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하버마스 교수는 자신의 청소년 시절 체험도 소개했다. 그는 누구나 가입했던 ‘히틀러 유겐트’(나치의 청소년 조직)의 정규 복무에 언어장애로 인해 동참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응급처치반의 하급 의무요원으로 일했다. “주말이 되면 애들이 집단으로 시내를 행진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그게 정말 너무 싫었어요. 나는 정규 복무를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14세였던 그의 업무는 같은 반의 어린 학생 몇 명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중 한 명이 두 살 아래의 한스 울리히 벨러였다. 그러나 벨러는 자주 교육에 나오지 않았다. 하버마스는 통상의 절차로서 우편엽서 크기의 미리 인쇄된 복무요청서를 1943년에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벨러는 이 문건을 일기장에 끼워 넣고 수십 년간 보관했던 것이다.
유명한 역사학자로 성장한 벨러는 1970년대 하버마스와 하룻밤을 지내면서 전쟁 경험을 회고하던 중 그 문건을 언급했으며 뒤에 이것을 찾아 그에게 보냈다. 다음 해에 그 문건에 관해 묻자 부인 우테 여사가 “위르겐이 이것을 삼켜버렸어요”라고 응수했을 때 모두 한바탕 웃었다. 누가 들어도 재치 있는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성 루머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치체제를 비판했던 하버마스 교수가 사실은 히틀러 유겐트의 지도자였으며 나치체제의 성공을 확신하고 지지했다는 해석이었다.
이 사건은 과거 청산에 얽힌 정치적 동기를 잘 보여준다. 물론 과거 청산은 미래를 위해 어디서나 중요하다. 그러나 정의는 문서 자체에 있지 않다. 문서의 일방적 해석에 있지도 않다. 정의는 소통과정에서 확립된다. 설사 범죄자, 가해자라 해도 말할 기회를 갖는 것은 정의에 필수적이다. 상보성의 원칙, 즉 상대의 관점을 방법론적으로 고려하는 데서 정의의 절차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통정의는 법에 의한 징벌로 끝나지 않는다. 권력으로 파괴된 공동체를 복원하려 한다. 하버마스 교수의 소통정의는 이 점에서 독보적이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소통 부재와 불공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귀중한 영감과 자극을 준다.
: : 하버마스는 누구 : :
생존한 지성 가운데 최고의 석학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위르겐 하버마스는 1929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대와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철학 및 사회학 교수를 지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제자로 ‘비판이론’을 계승했으며,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정립해 인간의 합리적 의사소통 능력이 자본과 권력의 기계적 메커니즘으로부터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세계를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도 책 출간과 언론 기고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하고 있다.
슈테른베르크=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