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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너희를 위해 태어났는데… 종이의 반란

입력 | 2012-07-14 03:00:00

디지털시대 경비절감 0순위라고? 고루하다고?종이 맛 좀 봐라




이 종이에 물을 담았다. 옻칠을 해 검은빛이 나는 세숫대야는 어느 선비의 도포자락 속에 매달려 과거길에 올랐으리라. 종이는 개울가에서 선비의 체통을 지켜줬고, 무작정 잠자리를 청한 대감집에서도 나그네의 자존감을 세워줬다. 가벼운 종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했을까. 김중만 사진작가 제공

종이는 늘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중국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만든 종이가 시초라고 해도 그 역사가 1900년이 넘습니다. 최근에는 종이 역사가 그보다 앞선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종이는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왔습니다. 종이가 있어서 기록이 가능했고 그 때문에 역사가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활동을 벌인 것도 종이의 공이 큽니다. 음악가, 화가, 소설가도 종이가 있었기에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종이가 갑자기 찬밥 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사장이 경비 절감을 외치면 사원들은 복사지 사용부터 줄입니다. e메일이 등장하면서 편지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젠 노트와 수첩 대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꺼내 드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디지털’이 발전하면서 종이는 ‘아날로그’를 대변하는 낡은 물건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인류가 종이에 의지해 살아온 세월은 자그마치 2000년 이상입니다. 그런데 디지털 문명 시대가 됐다고 순식간에 종이를 천덕꾸러기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종이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노릇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종이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나 봅니다. 종이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종이는 ‘기록을 위해 태어났고, 사용됐고, 앞으로도 그렇게 쓰이다 사라질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이는 이런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배신’합니다.

수백 년 전부터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 종이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반격’에 나섰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종이의 변신도 기대할 만합니다. 종이를 버리려 했던 사람들에 대한 신나는 ‘복수전’이 펼쳐질 테니까요. ‘종이는 고루하다’는 생각. 정작 고루한 것은 바로 그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 옛날 요강서 첨단 배터리까지… 종이처럼 상식깨며 살아봐! ▼


종이연구가 김경 씨(88·여)는 1965년 경북 안동의 한 대갓집에서 요상한 요강을 발견했다. 300년쯤 된 종이요강이었다. 여러 번의 간청 끝에 물건을 손에 넣은 그는 이후 평생을 종이와 함께했다. 전국을 다니며 종이공예품을 수집했고, 1970년대 중반부터는 아예 잠견지(蠶繭紙·신라시대의 최고급 종이), 고려지(高麗紙·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고려시대 때 종이) 등 옛 종이를 복원했다. 그가 종이에 빠져든 이유는 이랬다.

“(종이가) 요강으로 쓰일 정도인데, 뭐든 될 수 있겠다 싶었지.”

그가 맞았다. 우리가 미처 몰랐을 뿐, 종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뭐든 될 수 있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영역 파괴 행각’을 벌여 왔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오늘날에 이뤄지는 종이의 무한변신이 놀랄 일만은 아니다.

○ 정의(定義)를 배신하다


300년 된 종이요강에서는 시집가는 손녀딸의 부끄러움까지 가려 주려던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김중만 사진작가 제공

종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주로 섬유류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 글을 쓰거나 인쇄를 하는 등 다양한 용도에 이용되는 얇은 물품.’(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종이의 광범위한 활약상은 이런 정의를 무색하게 한다. 애초의 쓰임새를 벗어난 종이의 반란. 김 씨의 ‘보물 1호’인 종이요강이 바로 그 증거다. 이것을 보관해 온 집에선 “6대조 시할아버지가 손녀딸이 시집갈 때 가마 속에 넣어줬다가 나중에 되돌려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가마꾼이 지척에 있는 상황에서 젊은 여성이 소변을 해결하려면 소리가 큰 문제였을 터. 옻칠을 해 방수효과가 있으면서도 가볍고, 소리까지 줄여주는 종이요강만큼 ‘신부 맞춤형’인 물건이 또 있었을까. 종이요강의 사연에선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함께 손녀를 시집보내는 아쉬움이 한껏 묻어난다.

‘선비 맞춤형’ 물건도 여럿이었다. 종이세숫대야가 대표적이다. 선비 체면에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얼굴에 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선비들은 가벼운 종이세숫대야를 도포자락에 넣고 다니다 물가에 가면 찬물을 채워 더위를 식히곤 했다는 것이다. 선비의 도포자락은 넓디넓어 붓과 종이를 담는 큼지막한 필낭과 물병, 아내가 챙겨준 빗접까지 다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저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려면 종이의 ‘가벼움’이야말로 크나큰 장점이었을 것이다. 가벼움의 미학에 빠진 누군가는 종이지팡이까지 만들었다. 선조들의 재기 넘치는 지혜가 종이의 발칙한 배신을 부채질한 것이다.

김 씨는 ‘이야기가 있는 종이박물관’(2007년·김영사)에서 자신의 보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수집된 작품들을 유형별로 나눈다면 크게 여성용과 남성용이 있고, 이는 다시 휴대용품과 비품으로 나뉘는데, 비품은 여성용의 경우 반짇고리, 장과 농이 기본이고, 남성용에는 장과 궤와 함과 촉대 등이 있다. 나머지는 다 휴대용이거나 이동성이 강한 것들이다. 이는 종이라는 재질이 가볍고 따스하여서 다른 것에 비하여 휴대하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때는 심지어 종이로 만든 갑옷도 사용했다. 이른바 지갑(紙甲)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금속이나 가죽 갑옷은 소수의 장수만 입었고, 대다수 군졸들은 종이나 면직물, 마직물로 만든 싼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 박가영 숭의여대 전임강사(패션디자인전공)는 2009년 한국의류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조선시대 종이갑옷(紙甲)의 고증 제작’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조선 초기의 지갑은 종이를 접어서 갑찰을 만들고 사슴가죽 끈으로 엮은 후 검은 칠을 했다”며 “지갑은 가볍고 따뜻하며 제작과 염색이 용이하였고 비용도 절감되었다”고 밝혔다.

이쯤 되면 아예 종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할 필요성까지 느낀다. ‘주로 섬유류를 재료로 만들어 뭐든 될 수 있는 물품’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김 씨는 2010년 제주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살림집 옆에는 ‘종이의 집’이라는 작은 건물 하나를 지어 100∼300년 된 종이공예품 수백 점을 보관하고 있다. 올가을부터는 소규모 관람객을 받아 종이에 대한 이해를 나누고, 나중에는 적절한 박물관을 찾아 소장품을 기증할 계획이라고 했다. 종이의 낯선 모습이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 반격에 나서다

단단하지만 가벼운 종이지팡이는 동네 산책을 즐기려는 노인들에게 천군만마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김중만 사진작가 제공

종이를 뜻하는 영어 단어(paper)의 어원은 나일 강 유역 등 지중해 연안 습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papyrus·키가 1∼2m인 벼목 사초과의 여러해살이풀)에서 온 것으로 전해진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5000년 전부터 이 식물의 줄기 안쪽을 얇게 벗겨 필기 재료로 사용했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된 후 사람들은 종이에 ‘기록’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이후 종이는 인류의 지식을 기록하고 보전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에너지 낭비의 대명사’란 오명을 쓰게 됐다. 복사지 덜 쓰기, 종이컵 안 쓰기, 종이 가방 안 쓰기 등 종이를 멀리하는 게 곧 지구를 사랑하는 일이 돼 버렸다. 이런 변화에 대응해 종이는 일단 스스로 진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인쇄한 내용이 하루 후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종이는 ‘소극적 반격’의 사례다. 제록스 캐나다연구소는 2006년 “회사원들이 쓰는 종이의 44.5%는 잠깐 보려고 출력한 문서다. 복사한 문서 5장 중 1장은 그날 바로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처럼 낭비가 심각하니 종이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제록스는 16∼24시간 안에 글자가 사라지는 종이를 개발했다. 한 번 쓴 종이를 다음 날이면 새것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무려 50여 차례나 반복이 가능했다. 출력 내용이 사라지는 건 종이에 코팅된 특수 화학물질 때문. 이 물질은 가시광선을 쪼이면 서서히 원래 색깔로 돌아가는 특징이 있다. 상용화만 된다면 사무실에서 “종이 좀 아껴”란 말을 더는 듣지 않아도 될 듯하다.

사실 종이는 좀 더 ‘적극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요강과 지팡이, 우산 등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종이의 시선은 늘 자신의 영토 밖을 향한다. 최근에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플라스틱까지 위협할 태세다. 가장 주목되는 것 중 하나가 늘어나는 종이. 스웨덴 빌레루드가 2010년 선보인 파이버폼(Fibreform)은 원래 길이보다 15.6% 정도까지 늘어난다. 1m 길이의 종이라면 15cm 이상 늘어난다는 말이다. 일반 종이는 평균 2.6% 늘어날 수 있으니 신축률이 6배로 커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종이의 적용 범위가 훨씬 넓어질 것이다.

플라스틱의 영역을 침범하는 종이가 또 있으니 이른바 ‘가장 깨끗한 종이’다.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생산 공장에서 쓴다. 기존에는 패널을 옮기는 중 먼지가 붙거나 흠집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패널유리 사이에 플라스틱 필름을 붙였다. 종이는 표면이 거칠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새로 개발된 ‘LCD 유리 간지’는 5m² 넓이에 머리카락 두께의 티끌 2개 미만이 합격 기준일 만큼 깨끗하기 때문에 플라스틱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한솔제지 기술연구소의 서동준 수석연구원은 “이 종이를 생산하려면 원료인 펄프의 확보부터 출하까지 모든 단계를 꼼꼼히 관리하는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며 “세계에서 단 2곳만 생산 기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종이는 이미 항공업계로도 진출했다. 현재 비행기나 헬리콥터의 내장재가 ‘메타 아라미드 페이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은 화학섬유인 ‘아라미드’에서 나온 신소재인데, 아라미드는 1965년 듀폰이 처음 개발했으며 절연 능력이 뛰어나고 열에도 강하다.

앞서 종이의 가장 큰 매력은 ‘가벼움’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가벼운 것은 힘도 약할 거라고 여긴다. 두꺼운 골판지라도 ‘그래도 종이인데’라는 생각부터 한다. 그렇다면 최근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종이가구는 얼마나 안전한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안심하라”이다. 종이가구 전문 업체인 퍼니페이퍼의 어린이용 골판지 의자는 무게가 870g에 불과하지만 무려 180kg 이상의 하중을 견뎌낸다. 모습이 우스꽝스럽겠지만 웬만한 씨름선수가 앉아도 거뜬하다. 종이가구는 가벼워 이동이 쉬울 뿐 아니라 친환경적이라는 이점도 있다.

○ 복수를 꿈꾸다

단단하지만 가벼운 종이지팡이는 동네 산책을 즐기려는 노인들에게 천군만마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김중만 사진작가 제공

한 번 역공에 나선 종이의 기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디지털기기에 속절없이 내준 영토도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되찾을지 모른다. 윤혜정 서울대 교수(환경재료과학)는 “종이는 기록과 포장이라는 고유의 역할을 넘어서 정보기술(IT)이나 생물학 분야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달 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2012 국제 종이공학 콘퍼런스’에서는 ‘스마트페이퍼’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 스마트페이퍼는 단순히 정보를 적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대용량의 정보를 저장하거나 제공하는 종이를 말한다. 현재 핀란드와 스웨덴, 일본 등에서 IT와 종이를 접목한 복합체를 개발하는 연구가 한창이다. 윤 교수는 “스마트페이퍼의 개발이 완료되면 삶의 질은 한층 더 개선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IT업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종이 제품은 배터리다. 종이배터리가 현실화한다면 수많은 휴대용 전자기기는 자연스럽게 ‘다이어트’에 돌입하게 된다. 미국 렌셀러 폴리테크닉대 연구진은 2007년 검은색 탄소 나노튜브를 입힌 종이배터리를 만들었다.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다닐 수도 있고, 꼬거나 접을 수도 있다. 심지어 일부를 잘라내도 기능을 유지한다. 2009년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코팅 방법을 단순화해 생산단가를 낮춤으로써 상용화에 한발 더 다가섰다. 과학계는 궁극적으로 종이배터리를 인공장기 동력으로 쓴다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우리 몸의 혈액, 땀, 소변이 자연스럽게 배터리의 전기 발생을 위한 전해질로 이용되기 때문에 한 번 몸에 넣은 종이배터리는 다시 충전할 필요도 없다.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서는 ‘바이오액티브 종이’의 개발을 고대하고 있다. 이것은 생물학적 센서를 가진 종이다. 맥주병에 붙은 종이가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것처럼 세균이나 독성물질 등이 감지되면 내장된 잉크가 반응해 색깔을 나타내는 식이다. 이 종이를 포장지로 쓰면 제품이 유통되는 동안 손쉽게 품질관리를 할 수 있게 된다. 바이러스나 신경전달물질을 이용한 생물학적 테러를 예방하는 데도 이용될 수 있다.

종이의 욕심은 끝이 없다. 또 어디선가 종이의 낯선 모습을 마주할지 모를 일이다. 이제는 어떤가. ‘종이는 고루하다’는 생각에 아직도 변함이 없는가.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제주=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바로잡습니다 ▼

본보 7월 14-15일자 B1면 ‘종이의 반란’기사에서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때는 기원전이 아닌 기원후 105년입니다. 따라서 기자 중 종이의 역사는 2100년이 아니라 190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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