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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깔깔 웃는 동자승, 엉엉 우는 아이… 인간을 쏙 빼닮은 한지의 표정들

입력 | 2012-07-14 03:00:00

혼을 담는 종이 공예의 매력




제주 서귀포시 닥종이인형박물관에 전시된 함인순 작가의 ‘이빨 뽑는 아이’. 한지의 투박한 질감 덕분에 아이와 할머니의 표정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이양훈 사진작가 제공

① 할머니는 오늘 일곱 살 손자의 앞니를 빼기로 한 모양이다. 울며 몸부림치는 아이의 이빨에 일단 실을 묶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사탕이나 떡 따위로 잠깐 아이의 주의를 끈 다음 ‘탁’ 하고 줄을 당기리라. ② 대청에 걸터앉아 한 곳을 바라보는 노부부. 살아온 세월만큼 새겨진 주름이 아래로 처진 눈매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③ 아파트 거실에 ‘비키니’를 걸어두고는 그 앞에서 트레드밀(러닝머신) 위를 뛰는 노처녀. 그의 매서운 눈매에선 ‘올여름 반드시 저 비키니를 입을 테야’란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제주 서귀포시 법환동의 한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표정들. 그들은 관람객의 시선을 끌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귀에다 대고 자신의 얘기들을 속삭인다. 작가의 상상력과 솜씨가 빚어낸 생동감의 힘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들은 모두 종이로 만들어졌다.

이중식 닥종이인형박물관 대표(51)는 말한다.

“종이, 특히 닥종이(한지)는 얼굴 표정을 나타내는 데도 그만이지만, 수염이나 머릿결 등 디테일을 살리는 데도 아주 좋은 재료입니다.”

종이로 창조해낸 다양한 ‘피조물’들의 공통점은 뭘까. 종이 공예가들은 종이의 매력을 설명하는 데 참 많은 단어를 동원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가 있다. 바로 ‘따뜻함’이었다.

닥종이공예는 정성과 시간의 예술이다. 한 겹씩 종이를 뜯어 붙이는 데는 정성이, 붙인 종이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데는 시간이 든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문화원 3층. 여자 30여 명과 남자 1명이 왁자지껄 만들기 수업에 한창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학생들은 10년 안팎 경력의 닥종이인형 공예가들. 대부분 박순애 씨(66)의 제자다. 서울, 부산, 광주 등 ‘제 구역’으로 돌아가면 각자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지만…. 한국닥종이인형예술협회에 소속된 이들은 2년에 한 번씩 ‘빛뜨란’전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습한 날씨. 작가들의 손길은 더 정성스러워진다. 닥종이공예는 뼈대가 되는 피복전선을 제외하면 100% 한지가 재료다. 한지를 조금씩 뜯어 풀로 붙이며 기본적인 형태를 만들어 간다. 얼굴 등에 색깔을 넣을 땐 염색한 한지를 뜯어 붙인다. 종이의 가장 큰 적은 습기. 한지는 특히 더 그렇다. 잘 말리지 않으면 인형 속이 썩어버린다. 한 번에 종이를 7, 8겹 붙이고 나면 작업물이 마를 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완전히 건조가 된 후에야 다시 작업을 이어간다. 그러니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머리 하나 완성하는 데만 한 달 이상이 걸린다. 닥종이공예를 두고 ‘정성과 시간의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다.

동자승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온몸으로 깔깔대며 웃는 중이다. 빡빡 깎은 머리가 천진난만한 동자승들의 미소와 참 닮았다. 단순하지만 자연스러운 표정, 투박하면서도 세밀한 질감. 이런 것들이 박 씨가 꼽는 닥종이인형의 매력이다. 그는 특히 사람이든 동물이든 하나의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하기까지 ‘표정’에 가장 초점을 맞춘다고 했다.

“처음 인형을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살아 있는 표정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동작은 표정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니까요. 생각해 보면 사람의 표정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한지만 한 재료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한지를 자르지 않고 찢으면 종이 결이 보인다. 이것으로 사람의 속눈썹까지도 생생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 얼굴의 주름이나 머릿결, 동물의 털 등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 디테일에 강하니 표정도 살 수밖에. 물론 금속재질이나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표면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닥종이공예에서까지 책임져야 할 영역은 아니란다.

유일한 남자 회원인 박창우 씨(61)는 이미 해외에도 이름이 알려진 작가다. 지난해에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전시회에 초대돼 작품 ‘삶’과 ‘살풀이’를 전시했고, 내년에도 일본 순회전시회에 참여할 예정이다. 그는 “종이의 부드러운 질감은 어머니의 품속에서나 느낄 수 있는 포근함을 준다”고 말했다. 함께 작업에 열중하던 오선영 씨(46)는 “한지가 찢어지는 느낌은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다”며 “그래서 종이로 만들면 아무리 무서운 표정도 따뜻하게 보인다”고 덧붙였다.

실제 닥종이인형을 본 사람들은 “어쩜 어릴 적 나랑 똑같네” “그땐 정말 저랬지” 하며 슬며시 향수에 젖는 경우가 많다. 꼭 고향 시골집을, 우리네 과거를 재연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푸근한 웃음과 정감어린 동작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작가들이 종이에 불어넣은 혼, 그 따뜻한 혼이 다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셈이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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