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담는 종이 공예의 매력
제주 서귀포시 닥종이인형박물관에 전시된 함인순 작가의 ‘이빨 뽑는 아이’. 한지의 투박한 질감 덕분에 아이와 할머니의 표정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이양훈 사진작가 제공
제주 서귀포시 법환동의 한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표정들. 그들은 관람객의 시선을 끌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귀에다 대고 자신의 얘기들을 속삭인다. 작가의 상상력과 솜씨가 빚어낸 생동감의 힘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들은 모두 종이로 만들어졌다.
“종이, 특히 닥종이(한지)는 얼굴 표정을 나타내는 데도 그만이지만, 수염이나 머릿결 등 디테일을 살리는 데도 아주 좋은 재료입니다.”
종이로 창조해낸 다양한 ‘피조물’들의 공통점은 뭘까. 종이 공예가들은 종이의 매력을 설명하는 데 참 많은 단어를 동원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가 있다. 바로 ‘따뜻함’이었다.
닥종이공예는 정성과 시간의 예술이다. 한 겹씩 종이를 뜯어 붙이는 데는 정성이, 붙인 종이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데는 시간이 든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습한 날씨. 작가들의 손길은 더 정성스러워진다. 닥종이공예는 뼈대가 되는 피복전선을 제외하면 100% 한지가 재료다. 한지를 조금씩 뜯어 풀로 붙이며 기본적인 형태를 만들어 간다. 얼굴 등에 색깔을 넣을 땐 염색한 한지를 뜯어 붙인다. 종이의 가장 큰 적은 습기. 한지는 특히 더 그렇다. 잘 말리지 않으면 인형 속이 썩어버린다. 한 번에 종이를 7, 8겹 붙이고 나면 작업물이 마를 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완전히 건조가 된 후에야 다시 작업을 이어간다. 그러니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머리 하나 완성하는 데만 한 달 이상이 걸린다. 닥종이공예를 두고 ‘정성과 시간의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다.
“처음 인형을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살아 있는 표정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동작은 표정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니까요. 생각해 보면 사람의 표정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한지만 한 재료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한지를 자르지 않고 찢으면 종이 결이 보인다. 이것으로 사람의 속눈썹까지도 생생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 얼굴의 주름이나 머릿결, 동물의 털 등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 디테일에 강하니 표정도 살 수밖에. 물론 금속재질이나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표면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지만, 닥종이공예에서까지 책임져야 할 영역은 아니란다.
유일한 남자 회원인 박창우 씨(61)는 이미 해외에도 이름이 알려진 작가다. 지난해에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전시회에 초대돼 작품 ‘삶’과 ‘살풀이’를 전시했고, 내년에도 일본 순회전시회에 참여할 예정이다. 그는 “종이의 부드러운 질감은 어머니의 품속에서나 느낄 수 있는 포근함을 준다”고 말했다. 함께 작업에 열중하던 오선영 씨(46)는 “한지가 찢어지는 느낌은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다”며 “그래서 종이로 만들면 아무리 무서운 표정도 따뜻하게 보인다”고 덧붙였다.
실제 닥종이인형을 본 사람들은 “어쩜 어릴 적 나랑 똑같네” “그땐 정말 저랬지” 하며 슬며시 향수에 젖는 경우가 많다. 꼭 고향 시골집을, 우리네 과거를 재연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푸근한 웃음과 정감어린 동작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