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년 퇴적층 사이로 ‘한라산의 눈물’ 주르륵
이렇게 긴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는 곳이 제주도에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513호인 제주시 한경면의 수월봉 화산쇄설층(쇄설·碎屑은 깨어진 부스러기란 뜻)이다. 수월봉은 1만8000년 전 생긴 봉우리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535개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천연기념물은 크게 식물, 동물, 지질 및 광물, 천연보호구역의 4가지로 나뉜다. 그동안 천연기념물 스케치 여행에서 큰 나무가 주를 이루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2009년 지질 천연기념물로 새롭게 지정된 수월봉의 화산쇄설층을 찾아봤다.
제주도 서쪽의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선을 따라 관찰되는 이 쇄설암층 옆으로 놓인 해안길을 엉알길(또는 엉앙길)이라고 부른다. 제주도 사투리로 ‘낭떠러지 아래’라는 뜻으로 제주 올레 12코스에 포함되어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 절벽 위로 흐르는 세 가지 눈물
퇴적층 절벽 곳곳에서는 암반수가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를 ‘녹고의 눈물’이라 부르게 만든 슬픈 이야기도 함께 전해져 온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수월이와 녹고라는 이름의 남매가 병든 어머니를 위해 약초를 캐러 이곳에 왔다가 동생 수월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녹고는 죽은 누이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지금까지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녹고의 눈물은 사실 땅속의 빗물이 진흙으로 된 불투수성 지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밖으로 새어 나오는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옛 사람들에게 기기묘묘한 모습의 암벽을 타고 흐르는 물은 그저 누군가가 슬프게 우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또한 근처에는 커다란 구멍들도 보이는데 바로 제주도 여기저기에 뚫려 있는 일본군 진지의 흔적이다. 많은 제주도민들이 진지 공사의 강제 노역에 희생됐다. 멀게만 느껴지는 태평양전쟁이라는 아픈 역사가 생생한 현장으로 다가왔다.
잠시 엉알길 한쪽에 앉아 쉬어가기로 했다. 멀리 수월봉이 보인다. 문득 수월봉에 다시 올라가 제주에서 가장 멋지다는 낙조를 기다리며 늘어지게 쉬고 싶어진다. 눈앞에 펼쳐진 옥빛 제주 바다의 파도가 검은 현무암 해안의 바위 뒤에서 하얗게 흩어지는 걸 한동안 바라보았다.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도 서해안에 표류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멜은 13년 동안의 억류 생활에서 탈출해 귀국하는 배 위에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남겼다. 비록 회사로부터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한 보고서였지만, 그가 처절하게 생활하며 흘린 눈물을 짐작할 수 있다.
○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목적지인 용수리 포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태곳적 제주도의 향취가 나를 따른다. 지구 역사에는 아주 짧은 순간이겠지만, 내 생에는 길게 남을 제주여행을 마음속에 새겨 본다. 그 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