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꿈은 조직 보스…거친 놈들 ‘순한 양’으로 만들 터” 조폭 전용교회 세우는 안홍기 목사
건달 포스를 지녔지만, 안홍기(56) 목사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찬양의 교회’ 담임목사다. 베이징한인교회협의회 회장도 맡고 있다. 2002년 목사가 된 뒤 곧장 중국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으니 벌써 경력 10년차 목사다.
안 목사는 생김새만큼이나 대단한 이력을 지녔다. 정확히 말하면 흥미롭다. 소싯적에 주먹을 좀 썼단 얘기는 그럴만하다. 20대엔 원양어선에서 항해사를 했고, 인테리어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으며, 보디빌딩을 해 미스터코리아에도 올랐다는 말을 들으니 귀가 쫑긋해진다. 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이 죽어나간 아이티에서 2년간 교회를 개척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할 말을 잃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미궁에 빠지는 이력이었다. 게다가 안 목사가 요즘 한다는 일이 ‘조직폭력배 전용교회’를 만드는 것이란다. 웃음이 저절로 터졌다. 수년 전부터 후배 조폭 30여 명을 규합했고, 조만간 이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한다고 했다. 중국에 살지만, 교회가 들어설 장소를 알아보느라 요즘은 한국을 무시로 드나든다고 했다. 안 목사와의 인터뷰는 6월 27일 서울의 한 분위기 좋은 갤러리 카페에서 진행됐다.
“건달들이 ‘우리도 교회 하나 만들자’고 하도 성화를 해서…. 나도 그런 게 되겠나 싶었는데 하나님을 만난 조폭이 30명 정도로 늘어나니까 ‘가능하겠다’ 싶기도 하다. 일단 YMCA 같은 건물의 강의실을 하나 얻어 개척교회 식으로 해보려고 한다. 큰돈 안 들이고.”
▼ 조폭만 교인으로 받아주나.
“일단 그 친구들이 중심이 되겠지. 전국에 있는 조폭들이 궁금해서라도 한 번씩은 와보지 않을까 싶다. 기자는 교회 다니나? 이참에 우리 교회 나오면 되겠다(웃음).”
일단 개척교회 식으로 시작
“요즘 조폭들은 다들 친구다. 우리 때는 서로 치고받고 그랬는데, 요즘은 보스들끼리 계도 하고 그런다.”
▼ 주로 어디 조폭들인가.
“부산 애들도 있고, 서울 애들도 있고, 전라도 애들도 있고.”
▼ 교회 이름은.
▼ 몸이 아주 좋은데, 보디빌딩은 언제부터 했나.
“군대 있을 때부터 했다. 어릴 땐 유도도 하고 권투도 했는데, 보디빌딩이 나하고 제일 잘 맞았다. 또 선교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찬양사역을 하면서 보디빌딩으로 재미를 봐가지고….”
안 목사는 그냥 취미로 보디빌딩을 한 사람이 아니다. 선수생활도 오래한 프로 보디빌더다. 1997~98년 미스터서울을 지냈고, 1998년엔 미스터코리아에도 올랐다.
▼ 보디빌딩이 어떻게 선교에 도움이 됐나.
“한국에서 사고 치고 중국 베이징으로 도망 온 건달들은 대부분 한인촌 왕징에 있는 체육관에 모인다, 중국에서 할 게 없으니까. 나도 거기서 운동했다. 내가 역기 드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곤 ‘저 운동 좀 시켜주세요’라며 접근하는 건달이 많았다. 그러면 나는 ‘운동은 얼마든지 가르쳐줄 테니 약속 하나 하자. 앞으로 나를 보면 90도로 인사해라. 그리고 나랑 교회에 다니자’고 했다. 물론 그놈들은 내가 목사인지 몰랐지. 그렇게 만난 놈들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교회가 빠르게 성장했다. 개척한 지 3년 만에 교인이 350명을 넘었다. 한인 5만 명이 사는 베이징에서 350명 교인이면 대단한 것이다. 3~4년 만에 베이징에서 세 번째로 큰 교회가 됐다.”
▼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겠다.
“주중 대사를 오래하고 통일부 장관도 지낸 김하중 대사는 대통령 특사를 시켜 헌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항상 ‘나를 믿고 안 목사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해보라’며 힘을 주는 분이다.”
▼ 성경 공부는 어디서 했나.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게 2002년 10월 14일이고, 목사 안수 받고 두 달 만에 베이징에 가서 ‘찬양의 교회’를 만들었다.”
▼ 원래 목사가 꿈이었나.
“어릴 때 꿈은 조폭 보스였다. 내 고향이 익산이다. 예전 이름으론 이리, 이름난 건달이 많이 나온 곳이다. 내가 거기서 좀 치고 다녔다(웃음). 살이 끼었는지 내가 치면 꼭 사람이 다친다. 중학생 때 서울로 올라왔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을 때린 일로 퇴학당했다. 목사가 될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 퇴학당하고 학교는 그만 다녔나.
“퇴학당하고 군산으로 내려가 5년제 수산고등전문대에 들어갔다. 그 학교는 진짜 꼴통들만 모이는 일종의 대안학교다. 텃세가 심했지만 (주먹을 들어 보이며) 1년 만에 학교를 완전히 장악했다(웃음). 그리고 군산대 해양어로과를 졸업하고 원양어선을 탔다. 항해사로 일했다. 만약 원양어선을 안 타고 군산에 남았으면 분명히 큰 주먹이 됐을 것이다. 지금 건달 하는 친구들도 다들 인정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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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길이만한 칼을 머리맡에 두고…
▼ 돈 잘 버는 직업이었을 것 같은데, 항해사는 왜 그만뒀나.
“나는 사람을 잘 때려서 좋은 항해사 소리를 들었다. 선원을 묶어놓고 때렸으니까. 배 타면서 돈은 잘 벌었다. 당시 배운 거 없는 사람이 돈 버는 방법은 건달 아니면 선원이었다. 180t짜리 코딱지만한 배를 끌고 두 달을 달려 아프리카 모로코 해안, 스페인령 라스팔마스까지 가서 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타던 배가 침몰했다. 새벽에 나갔다가 작살이 났다. 자전과 공전의 영향으로 종종 나침반이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데, 그날이 그랬다. 바다인 줄 알고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육지에 처박고 침몰했다. 그 후 배를 안 탔다.”
배 침몰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안 목사는 하나님을 만났다. 1984년 일이다. 어릴 때 그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술병이나 던지고 목사 뒤에서 욕이나 하던 건달이었다. 부친이 대형교회 장로였는데도 그랬다. 기도하는 부친과 교인들의 얼굴에다 담배연기를 후후 불면서 좋아했다. 그야말로 개망나니였다. 안 목사는 “나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으면 때려 죽였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중국에서 교회를 개척한 이유는.
“우연히 중국에 간증을 하러 갔다가 눌러앉았다. 거기서 만난 중국 관료들이 ‘너희 나라 애들 때문에 중국 애들까지 아주 웃기지도 않게 변했다’며 한국 젊은이들을 위한 교회를 해보라고 권했다. 당시 중국에는 한국에서 도피성 유학을 온 애들이 많았다. 베이징 학원로에선 밤마다 한국 학생들이 술 퍼먹고 자빠져 자고 그랬다. 산부인과는 넘쳐나고. 그래서 눌러앉기로 결심했다.”
▼ 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이 죽은 아이티에서도 선교했다는데.
“중국에서 7년간 사역하고 미국으로 안식년을 갔다가 우연히 가게 됐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김현철이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 제안을 받고 들어갔다. 김현철 씨는 예전에 삼미그룹 회장을 지낸 분이다. 나는 처음에 그분이 타히티라는 줄 알고 속으로 ‘고갱이 말년을 보냈다는 환상적인 곳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좋다고 해놓고 보니까 타히티가 아니고 아이티였다(웃음).”
▼ 구호활동을 하러 간 건가.
“초청장을 받은 다음 날 지진이 났다(대지진은 2010년 1월 12일 발생했다. 지진으로 25만 명이 넘게 죽었고 30만 명 이상이 실종됐다). 하나님의 부름이라고 생각했다.”
▼ 들어가기 싫었겠다. 어땠나.
“아이티공항이 폐쇄돼 도미니카 산토도밍고에서부터 차를 타고 들어갔는데, 정말 지구 최악의 장면이 펼쳐졌다. 건물들이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구호장비조차 없어 죽은 사람들이 수백 명씩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 위험하지 않았나.
“‘세상에 선교 사각지대는 없다’고 호기를 부리며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다. 아이티 수도가 포르토프랭스라는 곳인데, 그 도시에는 ‘시티솔레이’라는 우범지역이 있다. 세계 최악의 빈곤지역, 세계 최고의 우범지역이다. 유엔군이 대낮에도 장갑차 뚜껑을 닫고 지나가는 곳이다. 거기서 교회를 개척했다. 머리맡에 팔 길이만한 칼을 두고 잠을 잤다. 그거면 한 10명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위안이 됐다.”
미스터코리아 시절의 안홍기 목사(왼쪽). 아이티에서 선교 활동을 할 당시 모습.
“나는 거기서 보디빌딩과 격투기로 선교했다. 한국 건달이나 그놈들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갱들 관심사가 다 거기서 거기다. 백 마디 말보다 팔뚝 보여주면서 아령 한 번 드는 게 효과가 좋았다(웃음).”
안 목사 말대로 시티솔레이는 세계 최악의 범죄지역이다. 폭동과 테러가 끊이질 않았다. 안 목사는 그곳에서 꼬박 2년 동안 ‘찬양의 교회’를 개척했다. 전 세계에서 온 선교팀, 자원봉사자들이 교회에 모였고 고아원과 장애인 시설을 찾아다니며 봉사했다. 대지진 직후 콜레라가 돌아 5만 명 넘게 죽었지만, 그때도 안 목사는 아이티를 떠나지 않았다.
“콜레라가 도니까 사람들이 나가라고, 왜 왔냐고 그랬다. 자원봉사자들도 마스크에 고무장갑 끼고 돌아다니고. 그런데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 죽어나가는 아이티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병에 걸릴 놈은 별의별 짓을 다 해도 걸리고, 안 걸릴 놈은 별의별 짓을 해도 안 걸린다고 믿었다. 다행히 그게 맞았고.”
건달들과 전 세계 다니며 복음 전할 것
▼ 중국에는 언제 다시 갔나.
“아이티에서 꼬박 2년 동안 있다가 지난해 말 다시 중국에 갔다. 가보니 교회가 아주 엉망이 돼 있었다. 교인들도 다 빠져나가고. 요즘은 교회를 재건하는 일과 함께 중국에 있는 한국인 재소자들을 돕는 일을 같이 한다. 중국의 각 교도소에 있는 한국인 재소자 수가 300명이 넘는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 가족들조차 포기한 사람들이다. 돌봐줄 사람이 없다. 얼마 전 중국 칭다오에서 마약판매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장모 씨를 돕는 사업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상자기사 참조)
기자가 안 목사를 만난 것도 사형수 장씨 때문이다. 장씨와 관련된 취재를 하던 중 장씨 가족을 통해 안 목사를 만났다.
▼ 앞으로 조폭 전용교회를 해야 하는데, 조폭들을 휘어잡는 노하우는 따로 있나.
“비결은 따로 없다. 굳이 따진다면, 강단 있게 나가는 것?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조폭들이 나를 찾아와 얘기를 하다 보면 얘들이 꼭 그런다. ‘목사님, 담배 한 대 피워도 됩니까?’라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다들 그러라고 할 텐데, 나는 ‘피우지 마라’고 한다. 다른 곳에선 피워도 목사 앞에선 담배 피우지 말라고. 그러면 애들이 움찔한다. 그런 말을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애들이니까. 서면파니 신상사파니 하는 애들도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일단 생긴 게 좀 먹힌다. 내 사진을 본 건달 대부분이 ‘사진만 보면 우리가 순한 어린 양’이라고 한다. 하여간 교회를 잘 만들어서 조폭들을 데리고 전 세계를 다니며 전도하고 복음도 전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하면 애들이 아주 감동한다. 나한테 ‘꼭 한 번만 목사님을 형님이라고 불러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서(웃음).”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