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권력자들은 역발상을 해냈다. 유대인으로부터 약탈한 재산을 스위스 은행에 맡긴 것이다. 유대인과 나치 모두가 스위스 은행의 고객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스위스 은행의 고객층은 훨씬 넓어졌다.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난 신생국의 독재자나 기업화한 각국 범죄조직의 검은 자금이 스위스로 몰려왔다. ‘검은돈의 천국’이라는 오명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검은돈을 끌어들이는 영업방식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철옹성 같은 비밀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2009년 스위스의 최대은행 UBS를 상대로 이 은행에 비밀계좌를 둔 미국인 탈세 혐의자 5만2000여 명의 명단 제출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스위스 정부가 나서서 협상했고 4000여 명의 정보가 넘어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스위스를 ‘조세도피처 회색국가군’에 포함시키자 스위스는 ‘OECD가 요구하는 기준의 조세협약’을 여러 나라와 맺는 방식으로 회색국가에서 벗어났다. 한국과 스위스 정부가 조세조약을 개정해 25일부터 한국인 탈세자들의 스위스 계좌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