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러버 ★★★★불 좀 꺼주세요 ★★★★
통속적 드라마의 구조를 따라가다가 돌연 이를 뒤집어버리는 해럴드 핀터의 전형 적 극작술을 보여주는 ‘더 러버’(위)와 극적인 사건을 감춰놓고 이를 구어체 대사 로 눙치듯 풀어놓는 이만희 강영걸 콤비의 전형적 스타일을 보여주는 ‘불 좀 꺼 주세요’. 연극열전·드림인터내셔널 제공
두 작품은 발표시기로 보면 30년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닮은 구석이 참 많다. 우선 유부남과 유부녀의 부적절한 만남을 그렸다. 무대 공간이 유부녀의 집이란 점도 같고 여배우의 과감한 노출연기가 등장하는 점도 닮았다. 두 작품 모두 겉모습만 보면 지극히 통속적인 불륜드라마의 구조를 갖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표면 아래서 관객의 통념을 통타하는 심층구조가 서서히 돌출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던 에로물이 ‘더 러버’에선 미스터리 심리극으로 둔갑하고 ‘불 좀 꺼주세요’에선 감동적인 종교극으로 돌변한다.
‘더 러버’(오경택 연출) 속 유부남과 유부녀는 부부다. 아침 출근시간 결혼생활 10년차의 권태기 부부로 헤어지는 그들은 오후에 각자의 정부로 둔갑해 짜릿한 역할 게임을 펼친다. 점잖은 남편 리처드(송영창)는 바람둥이 맥스가 돼 아내 사라(이승비)의 욕정을 채워준다. 흥미로운 점은 리처드와 맥스가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서로의 존재는 인지하면서도 전혀 딴사람처럼 군다는 점이다.
관객이 이런 도착적 게임의 실체를 파악할 무렵, 사라가 남편의 이중인격이 가져다주는 쾌감을 만끽할 무렵 연극은 돌변한다. 맥스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사라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리처드 역시 게임의 중단을 선언한다. 혼란에 빠진 사라는 예전으로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게임의 법칙이 통째로 바뀌었음을.
1976년 국내 초연 이후 ‘티타임의 정사’란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 작품의 진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현실(부부)과 환상(정부)의 이율배반적 구조를 폭로한 점이다. 환상은 현실의 금기(불륜)를 먹고 자란다. 하지만 금기가 더이상 금기로 작동하지 않게 되면 환상도 작동을 멈춘다. 리처드는 이를 꿰뚫어 봤다.
반면 ‘불 좀 꺼주세요’(강영걸 연출)에서 불륜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얽혀 있는 삶의 굴레를 끊어내는 칼이다. 연극 속 사내(박성준)와 여인(남기애·이효림)은 각자 배우자가 따로 있는 유부남과 유부녀다. 게다가 남자는 국회의원이고 여자는 교사다. 사회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도 사내는 여인을 계속 유혹한다. 여인도 몸을 사리긴 하지만 못내 싫지 않은 눈치다. 연극은 이들 남녀의 뒤얽힌 인연을 겉모습인 본신(本身)과 속모습인 분신(分身)의 4중주로 풀어낸다. 체면을 중시하는 본신의 내숭과 욕망에 충실한 분신의 독백이 교차하면서 지극히 통속적 남녀관계로 전락하던 둘의 희극적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강한 비극성을 드러낸다.
그 다음 순간 윤리적 전회(轉回)가 이뤄진다. 운명에 예속된 삶을 벗어나는 길은 니체의 말처럼 그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거부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작가는 이를 본능적인 ‘자정(自淨)기운’에 몸과 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러버’가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땔감으로 현실과 환상의 공모관계를 냉소적으로 폭로한다면 ‘불 좀 꺼주세요’는 허울과 명분에 질식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능에 충실한 삶으로의 복귀를 권한다.
: : i : : ‘더 러버’는 8월 13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3만∼4만 원. 02-766-6007. ‘불좀 꺼주세요’는 9월 9일까지 서울 연건동 대학로극장. 3만 원. 02-929-8679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