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글로벌 Hot 피플]4번째 신당 창당한 日오자와

입력 | 2012-07-17 03:00:00

黨해체-결성 반복한 ‘정치 9단’… ‘늑대 중년’ 별명도




11일 도쿄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국민의 생활이 제일’ 창당대회에서 오자와 이치로 대표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동아일보DB

《‘정치 9단’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또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오자와 전 일본 민주당 대표는 이달 11일 집권 민주당을 뛰쳐나와 신당 ‘국민의 생활이 제일’을 만들었다. 신생당(1993년) 신진당(1994년) 자유당(1998년)에 이어 네 번째 창당이다. 신당에 합류한 의원은 총 49명(중의원 37명, 참의원 12명). 중의원에서는 민주 자민당에 이어 제3당, 참의원에서는 민주 자민 공명당에 이어 제4당으로 부상했다. 그는 신당의 대표 겸 선거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오자와 대표의 나이는 올해 일흔. 민주당에 계속 있었으면 ‘당 대표’급 대우를 받으며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스스로 가시밭길에 나섰을까.

그는 게이오(慶應)대 경제학과를 나와 1969년 27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됐다. 건설상을 지낸 부친 오자와 사에키(小澤佐重喜)에게서 지역구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부친의 후광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유권자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이와테(巖手) 지역을 기반으로 14선의 관록을 쌓았다.

하지만 부친의 후광과 좋은 성격만으로는 오자와의 인기를 설명하기 힘들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1993년 ‘일본 개조 계획’이란 책에서 정치를 개혁하고 국가를 개조해 ‘저패니즈 드림’을 이룩하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일본 사회에서 진정성을 평가받아 책은 70여만 부나 팔렸다.

꿈을 향한 길은 험난했다. 1993년 6월 오자와는 집권 자민당을 뛰쳐나갔다. 앞서 1989년 47세에 자민당의 간사장이 됐기에 진득하게 붙어만 있으면 유력한 총리 후보였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개혁’을 외치며 탈당한 뒤 신생당을 출범시키고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연립정권을 탄생시켰다. 그의 탈당으로 자민당은 1993년 야당으로 전락했다.

2009년의 일본 정권교체도 오자와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총선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모호한 구호를 내걸었지만 오자와는 ‘약자와 지방’에 초점을 맞췄다. ‘생활이 제일’이라는 구호도 내놨다. 그 결과 총 480석 중 300석 이상의 민주당 중의원을 당선시키며 압승했다. 선거에서만큼은 ‘미다스의 손’이었다.

2009년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나서 관료개혁, 정치주도, 내각과 여당의 정책 일원화, 총리관저 시스템 강화, 대등한 미일(美日) 관계, 아시아태평양 중시 외교 등을 내놨다. 모두 오자와가 16년 전 일본 개조 계획에서 밝혔던 청사진 그대로였다. 오랜 세월 일관성 있게 꿈을 향해 달려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자와는 한국에 친근감을 표시한다. 김치를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더 좋아하고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재일동포를 포함한 외국인 영주자 지방참정권 문제에도 적극적이었다.

1999년 4월 방한한 오자와 당시 자유당 당수는 서울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가 묘역을 찾아 백범 김구 선생,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을 참배했다. 당시 그는 “한국민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의 묘소를 방문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에서 오자와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더이상 그를 ‘정치계의 황태자’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일본 정치구조상 꿈은 세력을, 세력은 돈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지지하는 수십 명의 의원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선거자금이 필요하다. 계파의 리더로서 오자와는 거대한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어느새 그에게는 불법 정치자금 의혹이 끊이질 않게 됐다. 검은돈과 연루됐다는 인상은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게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판을 깨는 정치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붙었다. 1993년 자민당을 뛰쳐나와 신생당을 만든 이후 당 해체와 결성을 반복했다. 만년 야당으로 남아 있었으면 끝없는 정치개혁을 지향했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민당과도 연립해 여당 신분이 되기도 했다.

여당 파트너로 있을 때도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연립정권 발족 당시 약속한 공약을 지키지 않으면 연립을 깨겠다고 여러 번 윽박질렀다. 이 때문에 ‘늑대소년’에 빗대 ‘늑대중년’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오자와 대표는 최근에도 집권 민주당이 총선 때 “증세는 없다”고 약속했다가 소비세(부가가치세) 증세를 주도한다며 탈당했다. 재무상 출신으로 재정 건전성의 중요성을 잘 알기에 증세를 추진하는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현 총리와는 물과 기름일 수밖에 없다.

오자와가 신당 창당 이후 내세운 공약들은 하나같이 포퓰리즘 공약에 가깝다. 이번에 만든 신당 ‘국민의 생활이 제일’은 ‘증세를 하기 전에 지역주권 확립을 위한 재정개혁, 디플레이션 해결’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당내에서 공공투자를 확대해 경기를 띄우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돈 나올 곳은 없는데(증세 반대) 쓸 곳은 많은(공공투자 확대) 상태여서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일본 언론은 신당에 대해 ‘포퓰리즘’, ‘대중영합주의’ 등의 표현으로 평가절하한다.

일본 정치권은 이르면 9월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선거의 달인인 오자와가 이번 선거에서는 어떤 성적표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