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도주했던 강남 귀족계 계주 자진 출석한 날
정 씨는 수년 전부터 서울 강남권에서 ‘정경회’ 계주를 맡아 매달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씩 곗돈을 부으면 은행 이자의 5, 6배를 쳐주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지인의 소개로 정 씨를 만난 김 씨는 “은행이나 부동산보다 돈을 굴리기 좋다”는 말에 정경회 초창기 멤버가 됐다. 이미 수차례 정 씨가 주도하는 계에 가입해 곗돈을 탄 김 씨는 “이번에 사기 당하기 전까지는 한 달에 1000만 원씩 곗돈을 붓고 탈 순서를 맨 뒤로 하면 남의 돈을 그냥 받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이자 수익이 괜찮았다”며 “오히려 돈이 너무 잘 불어나니 불안해서 곗돈을 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경회는 번호계와 낙찰계 방식으로 운영됐다. 계원이 매달 일정한 금액을 내면 번호계는 순서를 정해서 곗돈을 타고 낙찰계는 가장 적은 금액의 희망 곗돈을 써낸 사람이 먼저 돈을 타가는 방식으로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적은 금액을 타가면 남은 금액을 후순위 사람들이 나눠 갖는 것이다. 부동산이나 주식보다 단기간 수익이 높아 강남지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정 씨는 올 초부터 갖은 핑계를 대며 곗돈 지급을 미뤘다. 현재 경찰에 고소한 계원 10여 명이 받지 못한 돈은 60억여 원에 이른다.
17일 중국으로 도피했던 정 씨가 서울 송파구 가락동 송파경찰서에 자진 출석한다는 말에 피해를 본 김 씨 등 50, 60대 여성 10여 명이 경찰서로 찾아왔다. 이날 오후 9시경 정 씨가 조사를 받고 나오자 경찰서 로비는 중년 여성들의 고함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한 여성이 정 씨에게 삿대질을 하며 “어떻게 모은 돈인데 나를 속였느냐”며 소리쳤다. 하지만 명품으로 치장한 몇몇 중년 여성은 애써 다급한 마음을 감추고 품위를 지키려 했다. 이들은 “우리 품위 떨어지지 않도록 목소리를 높이진 말자”며 서로를 말리기도 했다. “푼돈인 몇천만 원 이자 받으려다가 별 고생을 다 한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 씨는 “중국에 쉬러 다녀왔다. 경찰 조사를 마치면 우리 다시 계를 잘 이어가 보자”며 고개를 숙였다.
피해자 중에는 몇 년 전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던 수백억 원의 귀족계 사기사건인 ‘다복회’나 ‘한마음회’ 때 피해를 본 사람도 있다. 주부 장모 씨(59)는 다복회가 깨진 후 피해 회복 문제로 만난 사람들의 소개로 한마음계와 정경회에 가입했다. 장 씨는 한마음계에서 4억 원의 피해를 봤지만 곗돈을 두 배까지 불려준다는 정 씨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일명 ‘다이아나’(귀금속 가게 주인에게서 따온 별명)로 불리며 과거 귀족계를 운영하다가 곗돈을 가로챘던 사람의 여동생도 정경회에 가입했다가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를 본 Y 씨는 “곗돈 사기범 동생도 계로 돈을 떼이는 곳이 강남”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한 피해 여성은 “우리 중에는 이름만 대면 다들 아는 고위직 남편, 대기업 임원 남편을 둔 주부들이 있고 판사 딸을 둔 엄마도 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가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강남지역 일부 부인은 귀족계를 세금도 안 내는 고수익 상품으로 여겨 불나방처럼 계를 찾고 돈을 붓는다”고 말했다. 경찰은 정 씨를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수사 중이라고 17일 밝혔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김성모 인턴기자 중앙대 경제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