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옹호한 68학생운동 비판… 항의 차원 대학강단 떠나정복자 같았던 서독의 동독 흡수… 상호존중 외면 후유증 낳아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오른쪽)가 독일 슈테른베르크 자택 근처 슈테른베르크 호숫가에서 한상진 교수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한상진 교수 제공
독일사회주의학생동맹(SDS)을 이끈 루디 두치케. 1960년대 말 독일에서 학생운동이 급진화되자 이를 비판한 하버마스 교수와 학생운동권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학생들은 테오도어 아도르노 교수(오른쪽 위)가 소장으로 있던 프랑크푸르트대 사회조사연구소까지 점령했다.
비판이론, 독일 학생운동에 영향
그러나 학생운동은 하버마스의 기대보다 앞서 급진화되었고 ‘위대한 거부’(마르쿠제의 표현)의 전략으로서 폭력의 정당성이 쟁점으로 제기되었다. “급진화된 운동권은 폭력의 사용을 옹호했습니다. 우리가 폭력의 수단으로 체제를 공격해야만 체제의 폭력적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이것은 잘못된 전략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리하여 하버마스 교수와 학생운동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운동권은 체제폭력과 저항폭력을 양쪽에 놓고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물었다. 침묵하는 다수는 결국 적의 손을 들어준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하버마스 교수는 분개하여 이런 전략은 ‘우파 파시즘’에 못지않게 나쁜 ‘좌파 파시즘’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런데 왜 학교를 떠났습니까?” “나는 항상 학문과 정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학문은 논쟁을 요구하지만 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합니다. 당시 대학은 너무도 정치화되었고 나는 그 한복판에 서게 되었어요. 동료들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이끌어준 은인 아도르노 교수의 죽음 앞에 나는 정말 망연자실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나는 강단을 떠나는 입장을 밝히는 공개서한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3명의 자녀를 키워야 할 아내가 며칠만 더 생각해보자고 청했습니다. 그때 이것을 발표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그때 독일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카를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박사가 17세 아래인 하버마스 교수에게 슈테른베르크의 막스플랑크연구소 공동소장직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강단을 떠나기로 결정하기 전에 왔습니까, 아니면 후에 왔습니까?”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전에 왔죠. 그것이 없었다면 나도 가정을 꾸려야 하는데 훨씬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많은 혜택이 보장된 정교수직을 버리고 1971년 시골로 내려가 1년간은 혼자 지내며 현재 거주하는 집을 짓느라 바빴다고 했다. 당시 뮌헨 올림픽 공사가 한창이어서 목수를 구하기도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곳에서 1983년까지 연구소의 공동소장으로 일했다.
혼란와중 은인 아도르노 교수 사망
이 경험은 소통의 어려움과 함께 공존의 지혜를 보여준다. 하버마스 교수는 모든 비판에 열려있는 소통을 옹호했기에 선택을 획일화하는 폭력노선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학생운동권은 또 다른 비판으로 응수하지 않고 대학을 점령하는 폭력행위로 맞섰다. 이로써 큰 곤경이 조성되었다. 그의 공개적인 폭력노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생운동의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졌다. 이것은 공적 지식인의 귀감이 되는 모습이다. 그때 그를 “자유주의 헌법에 충실한 유일한 좌파 지식인”으로 보았던 폰 바이츠제커 박사가 그를 영입하여 공존의 길을 열고 그를 반겼다. 자유주의 체제의 장점이 잘 살아난 셈이다.
“나는 당시 민족주의 감정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상상할 수 없이 강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나의 눈에는 후유증이 걱정되었습니다.” 요컨대 번개처럼 진행된 흡수통일은 서독에 의한 동독의 점령과 청산으로 이어지며 많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자의 정의 앞에 소통정의가 사라진 것이 큰 결함이었다.
여기서 그의 부인 우테 여사가 거들었다. “요즘 많이 거론되는 것이 세대 간 정의라고 합니다. 과거 동독의 젊은이들이 냉랭한 눈빛으로 부모들에게 대든대요. 과거의 잘못된 체제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과거가 송두리째 부정되면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대화를 잇기가 어렵다. 물론 비밀경찰 ‘슈타지’의 피해가 컸다. 그러나 동독의 경제는 동유럽권 가운데서 가장 양호한 것이었다. 하버마스 교수는 서독 정부가 좀 더 여유 있게 통일을 추진했다면 정복자의 정의 대신에 상호존중의 터전 위에서 쌍방의 자긍심을 살려 통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희망 어린 관측을 보였다.
“지나간 일이지만 우리가 좀 더 지혜로웠다면 기회가 왔을 때 전광석화처럼 통일할 것이 아니라 먼저 동독을 유럽연합에 가입시켜 경제를 발전시키고 정치를 개혁하면서 점진적으로 통일공동체를 만들었다면 결실이 훨씬 풍요로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통일방식은 과거 청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치 체제를 청산할 때는 독일이 피해자의 고통과 인접국가의 눈으로 자신을 보았습니다. 유럽의 성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요.” 그러나 독일이 통일될 때 서독은 동독을 소통의 파트너로 여기지 않았다. 주요 인적 자원과 경험을 일종의 쓰레기로 간주했다. 여기서 하버마스 교수의 비판이 시작된다. “동독인이 말할 기회도 없었고 이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급격한 화폐통합, 행정통합으로 통일공동체가 형성될 것으로 보았어요. 그러나 이것은 단견이었습니다.”
현재의 유럽연합의 위기에 대해서도 유럽 강국, 특히 독일은 통일 당시와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다고 하버마스 교수는 본다. “진정한 해결책은 유럽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유럽 시민의 관점으로 돌아가 타자의 생각을 수용하고 공존의 조건을 모색하는 소통정의, 소통민주주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자택을 나설 즈음 우테 여사가 좋은 정보를 주었다. “위르겐은 고대 종교에 대한 집필에 심혈을 쏟고 있어요. 유교와 불교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버마스 교수는 이 저술이 끝나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 직전에 한국에 와서 쉬고 글을 다듬으면서 저술의 방점을 찍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당신은 대인관계의 전문가야!” 하며 그는 웃었다.
슈테른베르크=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