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화된 경상-전라 방언 벗어나… 충청 강원 옌볜 평양 사투리로 진화
전남 벌교를 배경으로 진한 호남 사투리가 작렬하는 연극 ‘뻘’(위), 특별히 경상도 사투리 잘 쓰는 배우들을 오디션으로 선발해 공연 중인 연극 ‘전명출 평전’(아래). 두산아트센터 제공·남산예술센터 제공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뻘’은 1980년대 전남 보성군 벌교를 배경으로 한 배우들의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가 일품이다.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전명출 평전’은 경상도 사투리의 향연을 펼친다. “순님아 니가 이래 빨리 가뿌는구나. 모심기도 넘보다 두 배로 빠르고, 콩밭도 두 배로 빨리 매드만 결국 인생의 샷타를 여기서 내리는구나.”
공연계에서 의미 전달의 걸림돌이라며 주변부에 머물던 사투리가 최근 공연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대학로 아트센터K에서 공연 중인 연극 ‘옹점이’는 충청도, 4월 국립극단에서 제작한 이윤택 씨의 신작 ‘궁리’는 경상도, 3월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 연극 ‘878m의 봄’은 강원도 사투리의 향연을 펼쳐 내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나 충무아트홀에서 공연한 창작뮤지컬 ‘식구를 찾아서’는 대구 사투리로 무장하고 관객의 배꼽을 공략한다.
최근 사투리 공연의 특징은 도 단위를 넘어서 시군 단위로 좀 더 세분화한다는 점. ‘뻘’의 작가 김은성 씨는 지난해 ‘연변엄마’에서 중국 옌볜 사투리, 올해 ‘목란언니’에선 평양 사투리를 시도했다. 극단 동의 강량원 대표는 2005년 ‘해안’에서 인천 강화도 사투리, 2007년 초연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함북 사투리, 지난해 ‘상주 국수집’에서 경북 상주 지역만의 독특한 사투리로 희곡을 썼다. 극단 이루의 손기호 대표는 2004년부터 고향인 경북 경주 지역 사투리 맛을 살린 경주 3부작을 무대화해 각광을 받고 있다.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다.
이 작가들은 사투리 연구가라고 해도 될 만큼 표현에 공을 들인다. 전남 보성 출신인 김 씨는 조정래의 ‘태백산맥’같이 사투리가 잘 구사된 소설들을 수시로 읽고 인터넷을 활용해 특정 지역의 독특한 표현들을 찾아낸다. 사투리 대사 한 줄 쓰는 데 1∼2시간이 걸린다. 김 씨는 “연극은 중심이 아니고 주변부를 다뤄야 한다. 사투리 자체가 연극성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강 대표도 함경북도 방언은 서울대 방언학교, 상주 방언은 경상북도 도청의 도움을 받았다. 강 대표는 “1970, 80년대 표준어 쓰기 운동은 중심에 모든 걸 맞추려는 정치적 시도가 깔려 있다. 방언을 쓰는 것은 개인적, 지역적 삶을 옹호하는 일이다. 좀 더 다양한 지역의 방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경주 3부작을 공연한 극단 이루의 배우 중에 경북 출신은 1명도 없다“면서 “일부러 경주로 내려가 그곳 시립극단 배우들과 워크숍을 여러 차례 하면서 독특한 뉘앙스를 터득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투리 연극이 뜨면서 사투리 못 고치면 배우 대접을 받지도 못하던 예전과 달리 이젠 사투리 잘 쓰는 배우가 각광받는 시대가 됐다. ‘전명출 평전’에서 주인공 전명출의 처남댁 종란을 연기하는 이봉련 씨는 “사투리 잘하는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식구를…’에선 대구 사투리, 뮤지컬 ‘빨래’에선 전라도 사투리, ‘백년, 바람의 동료들’에선 경상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강애심 씨도 지난해 ‘연변엄마’와 ‘빨간시’에서 각각 옌볜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 올해 ‘878m의 봄’에서 강원도 사투리로 열연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