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믿었던 친구 중에 장군 카시우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 카시우스를 형제라 믿고 이집트 근방의 국경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지키는 줄 알았던 카시우스가 거기서 ‘황제’임을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믿음을 줬던 친구가 배신을 한 거지요. 무엇보다도 모욕감이 컸을 것입니다. 주변에서도 난리였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작태에 대해서는 분명히 응징해야 한다고. 당신이라면 어찌할까요? 그날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절대로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망동을 삼가라.… 남이 나를 모욕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그만이다.”
말이 쉽지 의혹이 누룩처럼 부풀고, 배신의 칼을 맞아 쓰라림 속에서 분노가 솟구칠 때 차분해질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내공입니다. 실망으로 분노가 솟구치는 상황에서 분노를 성찰의 에너지로 바꿔 쓰는 그 지혜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까?
배신을 당했을 때, 당신은 어떤 타입이십니까? 어쩌면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내고 응징하는 타입이십니까? 아니면 왜 그랬냐고 묻는 타입이십니까? 신뢰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신뢰하는 자만이 물을 수 있습니다. 왜 그랬냐고.
속지 않기 위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믿음을 주며 일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실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는 자꾸 권력 뒤에, 재물 뒤에 숨어 박약한 자존감을 감추려 합니다. 더더욱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럴수록 그는 재물과 권력에 집착하면서 난폭해집니다. 악순환이지요.
아우렐리우스를 스토아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스토아학파는 우리 안에 신적인 불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신적인 불꽃을 발견해야 하는 곳은 경건한 성전도 아니고, 한가한 강의실도 아닙니다. 거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배신과 음모가 춤을 추며, 간교한 혀와 무모한 용기가 판단을 흐리게 하는 중생의 땅이고,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길을 찾고자 했던 깨어있는 마음에서입니다.
2000년을 내려오는 명상록은 언제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올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쓰였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자기가 자신에게 쓴 영혼의 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