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456쪽·2만5000원·글항아리
김득신의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왕족이 행차할 때 주변 풍경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의 ‘대도도(待渡圖)’.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기다리는 선비의 모습을 담았다. 산수를 유람하며 시 짓고 노니는 건 선비들이나 가능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조선 팔도를 돌아다녔다. 여성은 집 근처에 구경거리가 있어도 맘 놓고 보러 가지 못했다. 글항아리 제공
제주에 살던 기생 출신 거상 만덕(1739∼1812)은 1795년 큰 흉년이 들자 재산을 풀어 백성 1000여 명을 먹여 살려냈다. 이를 고맙게 여긴 정조가 만덕의 소원을 묻자 이렇게 답한 것이다. 당시 여성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제주 사람들은 바다 건너 육지에 나오는 것 자체가 국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그러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소원이 금강산 유람일 수밖에.
조선시대 사람들도 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국내 여행기를 담은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여행은 지금과 달랐다. 무엇보다 목적이 뚜렷했다. 요샛말로 출장과 테마 여행을 결합한 형태였다고 할까.
명창들은 소리를 연마하고 좋은 스승을 찾기 위해, 장돌뱅이 장사꾼들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전국 각지를 떠돌았다. 이들의 여행길은 즐거움보다는 고단함이 컸다. “보부상은 사농공상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외로워서 그 신세가 부평초(浮萍草)와 같고, 종적이 바람 같다. 집도 없고, 처도 없으며, 동에서 먹고, 서에서 자다가, 길에서 병이 나도 구해줄 이가 없다.”(황석영 작가)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옛 선비들이 즐겼다는 ‘와유(臥遊·누워서 노닌다)’다. 중국 송나라 때 사람인 종병이 늙고 병들면 명산을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노년에 누워 보기 위해 자신이 유람했던 곳을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뒀다는 일화에서 나온 여행법이다. 와유족(族)을 요샛말로 옮기자면 ‘방콕족’ 정도가 될 듯하다. 조선 선비들은 그림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와유를 했다. 산수를 유람한 기행문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집에 돌로 만든 인공 산(석가산·石假山)을 만들어놓고 보며 즐겼다. 선비들끼리 모여 놀이판에 전국의 명승지를 그려놓고 주사위를 던져 말을 옮겨가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이렇게 옛 선비들은 와유에 익살, 자족과 풍류의 정신을 담았다.
학창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수학여행이 일제의 잔재라는 사실에는 마음이 씁쓸해진다. 일제강점기 대표적 수학여행지는 경주였다. 그 전통은 광복 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 경주였을까. 이는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쪽지역을 지배했다는 일본의 고대사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이 조선 식민지화의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경주를 수학여행지로 ‘악용’한 것이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