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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사람이 사는법]제주서 태어나, 제주 사오기를 만나, 제주 살레 만드는 건 운명

입력 | 2012-07-21 03:00:00

목공예가 양승필 씨




35년간 나무를 다뤄온 양승필 씨에게 톱은 평생의 친구다. 양 씨가 그의 작업실에서 가장 오랜 친구와 포즈를 취했다.

‘모든 나무는 습도에 민감하여 수축 팽창은 물론 터지거나 휘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섬세한 조직을 가진 사오기(산벚나무의 제주 방언)도 예외는 아닙니다. 너무나 훌륭한 이 고재(古材)가 가진 나뭇결과 색감을 생각할 때마다 어쩌다 제주에서 태어나 이러한 선택된 목공예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입니다.’

목공예가 양승필 씨(58)는 1989년 10월 제주 세종미술관에서 열린 생애 첫 전시회의 도록에 이런 글을 남겼다. 당시 만 35세에 불과했던 젊은 목수는 환갑을 앞둔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오기를 고집하고 있다. ‘생애 마지막 전시회’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를 이달 9일 제주에서 만났다.

○ 평생 제주나무와 벗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첫 전시회 때와 달라진 것은 그의 주소뿐이다.

제주시 삼도1동에 있던 ‘서호공방’은 1990년대 초 애월읍 유수암리로 자리를 옮겼다.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진 않지만, 내비게이션도 안내를 포기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도로까지 마중 나온 그의 차를 따라 5분 정도 산길을 거슬러가자 목재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왜 이곳이었을까.

“첫 전시회를 하고 나니까 사람도 많이 찾아오고 해서 일에 집중이 안 됐습니다. 처음엔 표선면(섬 동남쪽 지역)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거긴 너무 습하더군요. 그래서 아예 가장 건조한 서북쪽으로 왔죠.”

그는 목공예는 습기와의 싸움이라고 했다. 습도 조절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아무리 건조한 지역이라고 해도 여름철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집 곳곳에서 24시간 돌아가고 있는 제습기 7대가 목공예가의 고민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제주산 사오기(산벚나무)로 만든 제주 전통가구 ‘살레’.

양 씨의 주력 제품은 ‘살레’(부엌에서 쓰는 찬장을 일컫는 제주 방언)다. 주로 사오기로 만들다가 요즘은 굴무기(느티나무의 제주 방언)도 많이 쓴다. 사오기는 붉은 기운이 나는 흑갈색, 굴무기는 노르스름한 붉은색을 띤다. 두 나무는 바람이 많고 화산회토 토양인 제주에서 잘 자란다. 성장이 늦어 나이테 간격이 좁다. 그래서 재질이 단단하고 치밀할뿐더러 눈매(나무의 물관 구멍)가 매우 곱다.

그가 쓰는 고재는 대부분 옛집이나 건축물 등을 허물 때 나온 것들이다. 일종의 재활용품이지만 이름난 목수들은 생산된 지 얼마 안 되는 목재보다 고재를 더 선호한다. 양 씨는 두 번째 전시회(2008년) 도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조상들은 초가집 일부나 민구류(民具類·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쓴 도구나 기구)에 이 나무(사오기)를 써왔는데, 오랜 세월 먼지가 끼고, 정지(부엌)와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에 그을면 처음보다 더 고운 질감과 진한 색을 띤 새로운 나무로 거듭납니다. 바로 이 나무들로 가구를 만드는 것이 제 직업이며 제 삶입니다.”

예전 사람들도 고재를 즐겨 썼다. 제주 4·3사건 때 불탄 집터에서 ‘재활용 자재’가 나왔을 정도다. 현재 야생 사오기와 굴무기는 매우 드물다. 산중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있겠지만 마구 베어 쓸 순 없는 노릇이다. 이것도 양 씨 등 목공예가들이 고재를 쓰는 이유다.

○ 새벽 2시에 하루를 열다

목공예가의 삶은 고되다. 양 씨는 오전 2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그때부터 오전 5시 반 아침식사 전까지가 이른바 그의 ‘집중근무시간’이다. 찾아오는 사람도, 전화도 없는 시간이기에 효율성이 가장 높아서다. 그는 “오로지 나무와 나만 있는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아침식사 후에는 차를 마시며 잠깐 휴식을 취한다. 오전 7시에 다시 시작되는 하루 일과는 오후 6시가 돼서야 마무리된다. 길게는 하루 14시간을 작업실에 머무는 셈이다.

양 씨가 처음 나무를 잡은 지 벌써 35년. 한 달에 얼마나 많이 만드느냐는 질문에 그는 “금액으로 한 1000만 원쯤”이라고 했다. 그의 작품 하나가 보통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한 달에 고작 2, 3개를 만든다는 얘기다. 그만큼 작품 하나에 투입되는 시간과 정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고재를 쓰는 데 있다. 일반 목재는 일정한 크기로, 깔끔하게 다듬어져 나오지만 고재는 그야말로 ‘날것’이다. 잘라야 할 정확한 위치를 찾아야 버리는 부분이 적다. 아름다운 가구를 만들려면 무늬결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대패질을 하면서 다듬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양 씨는 “목공예는 순간적인 예술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미 목공예가로 명성을 얻은 그가 또 한 번의 전시회를 준비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에게 전시회는 엄청난 스트레스이자 새로운 출발점이기 때문이란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디자인이나 공정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다음 전시회는 2014년으로 예정돼 있습니다. 보통은 1년이나 1년 반쯤 준비하는데, 이번에는 내 생애 마지막 전시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 충분히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부드러운 질감과 자연스러운 무늬, 그리고 칼을 댈 때의 오묘한 느낌. 양 씨가 나무에 빠진 이유들이다. 그의 작품에는 나무 외의 어떤 것도 사용되지 않는다. 다소 투박하더라도 제주의 참맛을 내려면 그래야 한단다. 그런 말들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과, 또 그가 애지중지하는 150년 된 사오기와 참 닮았다.

제주=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