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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빅백, 불황과 함께 사라지다

입력 | 2012-07-21 03:00:00


《 “내각에서 제 핸드백은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마거릿 대처
2012년 현재 세상의 여자들은 둘로 나뉜다. 커다란 빅백을 짊어진 여자와 작은 숄더백을 어깨에 건 여자. 얼마 전 패피(패션피플)들이 잔뜩 모인 행사에 가서 깨달았다.

그들이 ‘파뤼(party)’라고 부르는 공간은, 스팽글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참석자들의 고양이를 닮은 눈빛들로 반짝거린다. 옷과 구두, 가방의 견적과 스타일 점수를 뽑는 눈빛들. 안녕하냐는 인사보다 ‘제 점수는요…’란 말이 어울리는 표정들. 슈퍼스타K만큼이나 박진감이 있다.

사람들은 원스오버(onceover·흘낏 훑어보기)라 부르는 이런 의식을 통해 트렌드를 읽는다. 패션브랜드들이 어마어마한 광고비를 잇백(It-Bag) 마케팅에 쏟아 부은 199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 유행을 주도한 건 빅백이었다. 등판만 한 가방을 등에 지고 다니면 ‘저건 거북이가 아니고 패피구나’ 했다. 쌀가마니만 한 크기에 굴 속 같은 내부를 비추는 조명까지 탑재한 궁극의 가방도 나왔다.

휴대전화와 노트북 같은 첨단 전자 디바이스들은 물론이고, 화장대를 통째로 쓸어 담은 ‘백인백(Bag in bag)’, 이불 홑청만 한 스카프, 무인도에서 1박 2일을 보낼 수 있을 만한 식량, 복용 시간별로 분류된 약상자, 환경보호를 위한 개인 컵, 갑자기 스카우트 제안을 받을 때를 대비한 포트폴리오, 어젯밤 읽던 소설책, 막 쇼핑한 물건들과 주부의 경우 아이 기저귀까지. ‘노마드’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일하는 여자들의 사무용품과 살림살이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여자 노숙인을 의미하는 ‘백 레이디’란 단어가 명품백을 든 전문직 여성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많던 ‘백 레이디’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오랜만에 보게 된 패피 대부분이 달랑거리는 작은 백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단순히 유행 탓은 아니었다. 가방에 컴퓨터와 자료와 열정을 담아 다니던 빅백녀 중 상당수가 불모의 현실과 불황에 내몰려 일을 떠났다. 몇몇은 사라지고, 다른 몇몇은 작은 핸드백을 흔들며 나타났다. 난 궁금했다. 유치원생용 같은 저 앙증맞은 백 안에 도대체 뭘 넣었을까?

손목에 거는 한 뼘 크기의 미니백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영국 여왕이다. 여왕의 의무는 ‘존재’이므로 노트북은커녕 종이 한 장 직접 갖고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뭐가 들었느냐는 언론의 집요한 호기심에 왕실은 “립스틱!”이라고 발표했다. 립스틱과 휴대전화가 겨우 들어갈 만한 핸드백을 든 낯선 패피들은 나폴레옹3세와 혼인한 외제니 황후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존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대처 총리는 빅백 쪽이었다. 그녀는 어디나 페라가모 악어백을 들고 다녔다. 악어백은 남성 각료들 사이에서 공포의 다른 이름이자 상징이었다. 핸드백은 ‘막 대하다’란 동사적 의미도 갖게 됐다. 은퇴한 철의 여인은 자선행사에 백을 내놓으며 “제 역할을 다한 각료”라고 소개했다.

‘핸드백은 여성의 자궁을 상징한다’는 정신분석학자의 주장은 언제나 으스스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영혼에 크기와 모양이 있다면, 그 주인이 고른 가방과 닮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핸드백의 크기와 형태는 삶에 부여된 의무를 상징하니까. 반면 로고는 꿈을 뜻한다.

그러므로 ‘새 핸드백을 사다’란 말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다’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하며 지난주 로마의 테르미니역에 있던 나는 그 유명한 이탈리아 소매치기에게 가방을 털렸다. ‘폴리치아’라 써 붙인 경찰서에서 실베스터 스탤론을 닮은 경찰관은 “가방 따위가 왜 필요한가. 주머니에 있는 것만 당신 것이다”라며 양손으로 주머니를 탕탕 쳤다. 세상에! 그러면 ‘메이드 인 이태리’ 구치와 페라가모, 펜디 가방은 왜 만들어 파느냐고요. 내 영혼은 어디에 담으란 말인가요.

‘로마에서 핸드백을 들다’란 말은 ‘어리숙한 관광객으로 보이다’라는 뜻이다. 구치와 페라가모는 역시 한국의 파뤼에서 들어줘야 한다.

消波忽溺 쇼퍼홀릭에게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글을 씁니다.

hold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