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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Hot 피플]존 로버츠 美 연방대법원장

입력 | 2012-07-23 03:00:00

이념보다 사회통합 앞세운 ‘열린 보수주의자’




2005년 7월 19일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연방대법원장으로 임명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바로 옆에 성조기가 있다. 사진 출처 CNN

지난달 28일 미국 시민들의 눈은 일제히 연방대법원에 쏠렸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상징적 개혁법안으로 ‘오바마 케어’라고까지 불린 ‘건강보험 개혁법(Affordable Care Act)’의 합헌 여부가 결정되는 날이었기 때문. 이날 ‘지혜의 9개 기둥’이라 불리는 연방대법관 9명의 손끝에 오바마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당시 미 언론들은 9명의 대법관의 이념적 성향이 보수, 진보 각각 4명, 중도 보수 1명이어서 민주당 오바마 정권에 불리한 5 대 4 위헌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5 대 4 합헌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누가 의외의 선택을 한 것일까. 다름 아닌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결 직후 보수층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신 있는 결정이었다. 정치적으로 양극화돼 첨예하게 대립해 왔던 연방대법원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미국 내에서 ‘유연한 보수주의자’로 불리는 로버츠 대법원장의 삶을 뉴욕타임스, 크리스천 사이언스모니터지 등 미 언론에 실린 내용으로 재구성해 본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로버츠 대법원장은 학창 시절 공부와 운동 모두 잘했던 ‘엄친아’였다.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던 밥 맥라버티 씨는 “로버츠는 자기보다 몸집이 훨씬 큰 선수에게도 머리를 들이밀고 악착같이 덤볐던 용감한 미식축구팀 주장”이라고 기억한다. 고교 스승 로런스 설리번 교사는 “라틴어를 잘해 고대 로마 서사시 시험에서 줄곧 1등이었다”고 회고한다. 역사학 교수를 꿈꿔 하버드대 역사학과에 입학한 로버츠 대법원장은 1976년 학부를 3년 만에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진로를 바꿔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한다. 로스쿨 동문이었던 리처드 라자러스 조지타운대 법학과 교수는 “로버츠는 공부벌레였다. 남들은 A마이너스 학점만 받아도 감지덕지할 때 그 점수에 만족하지 못했던 유일한 학생”이라고 회고했다.

2009년 1월 21일 백악관에서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왼쪽) 주관 아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본래 오바마 대통령은 하루 전인 20일 워싱턴 의회의사당 앞에서 취임선서를 했지만 로버츠 대법원장이 취임 선서문의 어순을 실수로 바꿔 읽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백악관에서 취임선서를 다시 하는 해프닝을 겪었다. 사진 출처 미 백악관

로버츠 대법원장의 이념적 성향은 학창시절 때부터 ‘보수’였지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었던 그는 하버드대 재학 시절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여름방학 기간에 제철소로 달려가 현장 근로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할 때는 동성애자와 노숙인들의 권리를 대변한 적도 있다.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이자 로버츠 대법원장과 로스쿨 동기인 변호사 윌리엄 카야타는 “로버츠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고 상대방 의견이 옳으면 수용할 줄 아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이 같은 그의 성향은 2005년 대법원장 인준 투표에 참여한 공화당 의원 대다수는 물론이고 22명의 민주당 의원들까지 지지해 78(찬) 대 22(반)라는 초당적 지지를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2005년 그의 삶을 집중 조명한 뉴욕타임스는 “그에게 있어 보수주의란 기존의 것을 단순히 지키는 게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바탕 안에서의 ‘(끊임없는) 변화’를 의미한다”고 전했다.

그는 뉴욕 주 항소법원 판사 밑에서 법률연구원으로 법조계에 발을 들인 지 26년 만에 2005년 17대 미 연방대법원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로 1789년 미 대법원이 생긴 이래 세 번째로 최연소 대법원장이었다(1789년 초대 대법원장 존 제이가 44세, 1801년 대법원장에 오른 존 마셜이 46세였다).

그는 재임기간에 낙태 및 안락사 문제에 대해 단호한 보수적 입장을 보였다.

2007년 임신 중기 혹은 후기에 태아를 유도 분만시킨 뒤 죽이는 ‘부분 출산 낙태금지법(PAB)’에 대해 최종 합헌 판결을 내린 것은 역사적 판결로 평가된다. 당시 보수층과 기독교계는 낙태법이 태아에게 너무 잔인하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일부에서는 여성의 낙태 권리가 더 중요하다며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로버츠가 이끄는 대법원은 5 대 4 합헌 판결을 내렸다. 2007년 4월 19일자 뉴욕타임스는 “낙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여성의 인권’에서 저항 능력이 없는 태아들의 ‘운명’으로 바꾼 역사적 판결”이라고 평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이번 건강보험개혁법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미 언론들은 “이미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대해 사법부가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의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는 고려를 한 것”이라 분석하고 있다. 이런 분석은 무엇보다 현재 연방대법관들 사이에 이념 대립이 그 어느 때보다 극에 달해 사회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6월 뉴욕타임스(NYT)·CBS 공동여론조사에 따르면 미 국민의 44%만이 대법원 결정을 신뢰한다고 했고 4명 중 3명은 대법관들 개인의 신념이나 정치적 견해가 판결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인준청문회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자녀 세대에게 사법부를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적이고 강한 기관으로 물려주는 것이 제 희망입니다.”

정쟁으로 대법관을 임명하지도 못해 사상 초유의 공석 사태를 맞고 있는 한국 정치권과 법조계에 그의 메시지가 던지는 울림이 크다.

백연상 기자 bae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