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논설위원
예능프로가 대통령을 만든다?
애초 그가 대통령감으로 인지도가 급상승한 것도 2009년 6월 MBC ‘무릎팍 도사’를 통해서다. 의사에서 벤처기업인, 교수로 변신한 자신의 ‘비효율적 삶’을 말하며 “내 평생직업이 뭔지 모르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고, 강호동은 “직업을 바꿀수록 나라가 윤택해진다”고 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얘기다.
“현대 정치는 폴리테인먼트(폴리틱스+엔터테인먼트)다.” 올 초 ‘폴리테인먼트’라는 책을 낸 미국 햄린대 데이비드 슐츠 교수는 일갈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나 인기로 먹고살고, 투표장 표나 매표소 표나 마음과 돈이 움직인다. 색소폰 부는 명장면으로 유권자를 사로잡은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정치적 개그맨 김제동은 “살벌한 말을 그렇게 웃는 얼굴로 하는 사람도 없다”고 안철수의 예능적 기질을 간파했다. 인기를 업고 정치에 입문한 연예인만 있던 우리나라에서 안철수는 ‘예능프로가 대통령을 만든다’는 미디어의 신기원을 이룩할 판이다.
슐츠가 ‘폴리테인먼트에서 이기는 10가지 법칙’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멀티미디어가 메시지”다. 안철수는 강연에다 엔터테인먼트 코드를 섞은 ‘청춘콘서트’에 이어, 공중파부터 다채널방송 스마트폰 앱까지 메시지를 무한 확산시키는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소통으로 다양한 세대와 계층 속에 안철수라는 상품을 무료 배포했다. 불통의 정치인 때문에 사회통합이 안 된다거나, 소통이 시대정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안철수는 이미 대통령(大統領) 아닌 소통령(疏通領)이다.
정치를 예능프로처럼 재미있게, 정책을 콘서트와 인터뷰 책으로 쉽게 알린 안철수의 능력은 웬만한 정치인을 능가한다. 정치에 관심 없던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고, 정적들을 긴장하게 만든 것만 봐도 사회적 공헌이 상당하다. 그러나 정치를 예능프로처럼 하는 바람에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위험성도 적지 않다.
당장 힐링캠프 출연을 거절당했던 민주당 대선주자 손학규 김두관 측에서 방송의 편파성을 문제 삼고 있다. 문재인이 올 1월 힐링캠프에서 10.5%의 시청률을 올린 뒤 대선 지지율이 급등한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안철수 측에서 모델로 삼는다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2년 TV 선거광고를 활용한 첫 후보자였지만 돈 내고 했지, TV 예능프로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았다. 책 ‘안철수의 생각’에서 공정한 기회, 공공재로서의 언론 기능을 강조한 안철수로서는 그게 정의냐, 그게 공정방송이냐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게 됐다. 더구나 입만 열면 대기업을 비판하면서, 방송 중에서도 대기업인 공중파를 골라 출연해 효율적으로 지지율을 올리는 것도 표리부동하다.
4·11총선에서 민주당이 패한 데는 ‘나꼼수’의 인기를 믿고 막말 후보를 내보낸 민주당에 대한 분노가 컸다. 안철수가 언어는 점잖지만 대담도 아니고 보도도 아닌 예능프로에서 사실상 정치를 개시하는 건 적잖은 국민에게 불편하다. 주류 올드미디어 종사자의 질투가 아니다. 국민은 정치가 싫고, 정치인을 혐오할 수도 있지만 대통령은, 적어도 정치를 염두에 둔 사람은 정치에 대한 예의를 보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오락프로인 만큼 안철수가 문재인의 기왓장 격파를 무색하게 하는 식스팩 복근을 자랑한대도 내가 어쩔 수는 없다. 그러나 양극화나 청년실업 같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문제가 ‘구체제’라고 책에서 통탄을 하고는, 그 구체제의 한 축인 야당과 후보 단일화를 하는 일이야말로 지금까지 한 모든 말을 거짓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 폴리테인먼트의 하이라이트인 셈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