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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고

입력 | 2012-07-24 03:00:00

‘강남스타일’ 슈퍼히어로 쿨한 척하기는… 제대로 망가져야 전설이 되리




19일 개봉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개봉 나흘 동안 240여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면서 그야말로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전작인 ‘메멘토’ ‘다크 나이트’ ‘인셉션’ 등을 통해 ‘쉬운 얘기를 무지하게 어렵게 할 줄 아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야심작인지라 나는 워낙 큰 기대를 갖고 이번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카카오톡으로 대화만 나누던 여성을 실제로 만날 때 느끼는 감정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쁘진 않지만, 기대엔 분명 못 미친다는 말이다. 이 영화는 장엄하고 우아하지만 2시간 44분의 긴 상영시간을 채울 만큼 깊고 짙은 이야깃거리와 치명적인 캐릭터의 매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나는 이 영화가 두 가지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먼저 ‘돈 자랑’을 하지 않은 게 좋았다. 이 영화는 2억5000만 달러, 즉 3000억 원에 가까운 막대한 돈을 때려 부은 ‘티’를 촌스럽게 내려 하지 않았다. 주먹과 주먹, 근육과 근육이 쩍쩍 달라붙고 부딪치는 데서 오는 원초적인 공포와 쾌감은 요즘 SF 블록버스터들 속에서는 찾기 힘든 현실적 질감을 뿜어냈다.

‘캣 우먼’(앤 해서웨이)으로부터 ‘고양이’라는 동물성을 걷어낸 캐릭터 포지셔닝도 놀라웠다. 과거 팀 버턴 감독의 캣 우먼(미셸 파이퍼)은 고양이처럼 ‘야옹야옹’ 하면서 뇌쇄적인 체하느라 무진 노력을 했다. 해서웨이의 캣 우먼은 고양이 흉내 대신 치명적인 결핍을 내면에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여성을 은유하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로 설정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 속 배트맨이 더욱 ‘강남 스타일’이 된 것은 영 못마땅했다. 수억 달러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리고도 ‘쿨’하게 대처하는 그가 파산에 맞닥뜨려 좀 더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무기 비행체 ‘더 배트’도 아쉬웠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과 달리 중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망토를 쫙 펼쳐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던 배트맨의 물리적 한계는 그가 풍기는 인간적인 매력이었던 것이다.

전작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너무도 설득력 넘치는 존재적 고민(‘법에 의거하지 않고 악당을 제거하는 나는 과연 정의인가’ 하는)을 하는 통에 이번 작품에선 더 있어 보이는(?) 고민을 하기가 쉽지 않았겠다. 그래도 슈퍼히어로란 자가 기껏 ‘나를 거부한 세상 사람들이 악당에 의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정의의 수호자로 다시 나설 것인지’를 고민하고 앉아있다니!

이런 배트맨의 삼류 고민에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보나마나 다시 팔 걷어붙이고 나설 게 뻔하지 않은가. 나는 폼 잡고 고민하는 척하다 ‘역시 내가 아니면 안 돼’ 하고 나서는 슈퍼히어로들이 싫다. 세상은 ‘내가 아니면 안 돼’ 하는 놈들 때문에 오히려 혼탁한 게 아닌가 말이다.

전작 ‘다크 나이트’가 위대했던 까닭은 배트맨이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는 자기 파괴적 의문을 가졌다는 놀라운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The Dark Knight Rises(어둠의 기사, 일어나다)’가 아니라 ‘The Dark Knight Falls(어둠의 기사, 추락하다)’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정말 이 영화의 홍보문구대로 전설이 완성되었을 텐데.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