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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플러스/칼럼]불멸의 패션 아이콘, 오드리 헵번

입력 | 2012-07-24 14:02:11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패션에 있어 스타와 디자이너의 교류는 언제나 세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곤 한다. 특히 각종 시상식 무대 위에서나, 레드 카펫 위에서의 교류는 더욱 그 반향이 커지기 마련이다.

디자이너와 스타의 교류가 적합했다면 찬사를 받는 스타일이 되어 반향이 더욱 커져 갈 것이고, 과하거나 모자랐다면 혹평을 받는 스타일이 되어 반향은 잦아들 것이다.
 
무대나 레드카펫 위에 있는 스타는 그 순간이 대중들에게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기에, 그런 바람을 현실화 하기 위해서 크리에이터인 디자이너와의 교류를 하게 된다. 이러한 교류의 과정을 통해 스타들은 디자이너가 만든 의상을 통해 자신만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을 더 강렬하게 발산시키게 되고, 또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부각시키게 되는 반면, 디자이너들은 스타들을 자신의 디자인의 대상으로 삼거나 혹은 스타들로부터 직접적인 영감을 얻고,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디자인을 해 나가게 된다.

이렇게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 그들을 일컬어 ‘뮤즈(Muse)’라고 한다. 할리우드 역사를 살펴보면 당대의 최고의 스타들은 언제나 당시의 유명 디자이너들과의 친밀한 교류가 있었고, 그런 교류를 통해 그들은 디자이너들에게 패션 뮤즈로 존재했다.

그 중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과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시대를 초월한 신뢰 관계는 무척이나 유명한 이야기다.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의 만남에 관한 실제 이야기를 통해 디자이너에 있어 패션 뮤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새로운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은 유럽의 왕국의 공주 ‘앤’ 역을 맡게 됐다. 상대역인 저널리스트 ‘조 브래들리’역은 당대의 최고 핸섬 남으로 통했던, ‘그레고리 펙’이 맡았다. 그것이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소속배우(당시는 할리우드 영화사에 소속배우가 존재하던 시절이었음)였던 오드리 헵번에게 주어진 ‘빅 프로젝트’ 였다.

1953년, 파라마운트 영화사와 7년간 계약을 체결한 이 ‘유럽에서 온 날씬이’는 보통의 스타들이라면 당연히 받게 되는 탈의실부터 영화 촬영장까지 제공되는 리무진 서비스를 거부하고, 대신 발레 슈즈 차림으로 걸어 다니거나, 감독이 선물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당시의 할리우드 여배우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또한 ‘작은 가슴에 슬림한 히프, 마릴린 몬로와는 정반대’라고 ‘라이프’지에 기사가 실릴 정도로, 마릴린 몬로와 같은 육감적인 몸매가 여배우의 정석이라고 생각되던 시대였기에, 당시의 정황으로 보자면 체구적인 측면에서도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부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은 “마럴린 몬로 이후에 영화 역사상 최고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배우가 되었다” 라고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의상 디자이너 ‘에디스 헤드’는 말했다.

파라마운트 영화사가 제작한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의 영화 의상도 당연히 에디스 헤드의 작품이지만, 영화 속의 의상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의상도 에디스 헤드가 제작한 의상을 즐겨 입을 정도로 그녀는 에디스 헤드의 의상을 매우 좋아했다.


오드리 헵번은 촬영 중간마다 유럽의 패션 잡지들을 탐독할 정도로 패션을 사랑했고, 또 관심도 많았다. 오드리 헵번의 패션 사랑을 여실히 알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이야기 하자면, 그녀가 프랑스 코미디 영화 ‘몬테카를로 베이비’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가 시나리오도 캐스팅 관련도 아닌, 바로 그녀가 걸어가는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디올의 끈 없는 레이스 장식의 파티 드레스를 입는 것을 제작자가 흔쾌히 허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 오드리 헵번 이었기에 영화 ‘사브리나’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감독에게 ‘사브리나’라는 캐릭터가 진정성을 갖기 위해 실제로 파리로부터 공수된 의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래서 영화사는 영화사 소속의 디자이너가 아닌 진짜 파리의 디자이너에게 영화를 위한 의상 제작을 맡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영화의 ‘사브리나’라는 캐릭터 상, 파리에서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사브리나의 이른바 ‘환골탈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감독은 흔쾌히 그녀의 의견을 수렴했고, 파라마운트 영화사로부터 ‘사브리나’의 캐릭터를 위해 오드리 헵번에게 프랑스산의 최상 퀄리티의 의상과 모자가 필요하다는 허가를 얻어냈다. 그녀는 기쁨을 금치 못했고, 그 길로 의상에 드는 비용을 최소한으로 삭감하기 위해 혼자서 파리로 향했다. 오드리 헵번은 ‘사브리나’라는 캐릭터를 위해 개인적으로 최선이라 생각하는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그를 만나기 위해 파리의 ‘알프레드 비니’가에 위치한 고딕풍의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의 메종(디자이너의 매장이자 동시에 디자인을 하는 아뜰리에)을 방문했다.

파리의 세느강 남쪽, 생-제르만-데-프레(Saint-Germain-des-Pres)지역의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마치 보헤미안과도 같이 자유분방하게 생활을 즐겼던 지방시는, 기존의 딱딱한 ‘오뜨 쿠튀르’와는 다른 해석의 분위기의 명쾌하며, 핏은 슬림하고, 소재의 느낌은 가벼운 ‘모던 스포츠웨어 룩’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의상에 있어서 고대 철학자들이 이론화한 자유의  컨셉을 패션적으로 재해석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독창적인 콘셉트였다. 그런 지방시의 새로운 해석법과 자유로운 마인드에 수많은 패션 에디터들이 일제히 엄청난 환호와 찬사를 보냈고, 그것은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이 창시한 ‘뉴 룩’ 이후 처음 있는 패션계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53년 6월의 어느 날 오후, 오드리 헵번이 지방시 메종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처음 들었던 말은 도어맨이 공손히 건넨 ‘마드모아젤’이라는 말이었다. 파라마운트 영화사로부터 받은 돈이 들어있는 두둑한 주머니 속 사정을 모르는 도어맨은 그녀를 단순한 여행객쯤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영화 ‘로마의 휴일’의 런던 프리미어가 그로부터 한달 뒤의 일이었고, 아직 파리에는 상영 계획조차 잡히지 않았을 때였기에, 아직 오드리 헵번의 얼굴을 알아 보는 사람이 파리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용기를 내어 큰 소리로 “나는 무슈 지방시를 만나고 싶어요”라고 직원에게 말하자, 그녀를 메종 안 지방시의 개인 사무실로 인도해 주었다. 사무실에서 처음 오드리 헵번을 대면한 지방시는 실망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냐면 지방시는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프랑스 제작 지부장으로부터 ‘미스 헵번’이 메종으로 방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연락을 사전에 받고는, 아직 유럽에서는 이름조차 생소한 ‘오드리 헵번’이 아닌 MGM의 전설적인 여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을 만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시는 정중하면서도 간단 명료하게 ‘사브리나’에 의사를 표했다.

“나는 지금 다음 컬렉션을 위한 작업 중이라 그녀와 함께 작업을 할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애원하듯 부탁했고, 지방시는 마지 못해 그녀가 원하는 의상을 자신의 이번 컬렉션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제안했다. 그러자 그녀는 거의 순식간에 영화 ‘사브리나’의 세 가지 장면을 위한 의상들을 골라 냈다. 그 첫번째 착장은 겉면이 진한 회색 플란넬 소재의 수트였는데, 헵번이 그 의상을 시착하고 발레의 한 동작을 하듯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보았고, 지방시는 그 착장에 장갑을 더해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오드리 헵번은 다음으로 끈이 없는 하얀 오간디 드레스를 입었는데, 지방시는 마치 그 드레스가 처음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 진 것 만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녀의 몸에 착 감기듯이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검정 피케 면 소재에 물결무늬를 넣은 칵테일 드레스 역시,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 진 듯 허리 라인은 더욱 잘록해 보였고 스커트는 가볍게 너울거렸으며, 활처럼 휜 허리의 잠금 부분은 팔로 자연스레 가려지고 등 부분은 버튼식 잠금으로 V형으로 모양이 났다. 또한 네크라인은 쇄골이 보이게 넓게 커팅된 ‘보트넥’을 적절히 참조한,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의 선원들이 입는 세일러 셔츠’처럼 수평 모양으로 커팅되었다. 이 네크라인은 나중에 ‘사브리나 데콜테’라고 알려지게 됐고, 피케 소재의 블랙 드레스와 함께 영화 개봉 후, 지방시의 주요 상품이 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오드리 헵번은 이 네크라인을 너무 좋아했어요. 왜냐면 그녀의 빈약한 쇄골을 가려주면서 그녀의 좋은 어깨 라인을 살려 주었기 때문이었죠”라고 지방시는 기억했다. 그렇게 여배우 오드리 헵번과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의 만남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후 오드리 헵번의 약혼자, 배우 ‘멜 페러’는 그녀가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되자 그녀에게 4번째 지방시 의상을 선물했다. 화이트 컬러의 빳빳한 오간디 소재로 만든 칵테일 드레스는 전형적인 지방시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1954년에 열린 제2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드리 헵번은 처음으로 지방시의 의상을 레드카펫 위에서 선보이게 되었다.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4번째 지방시 드레스를 입고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때를 시작으로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나머지 생애에서 언제나 지방시의 의상과 함께 하게 됐다. 지방시만이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이미지 메이커였던 것이다. 1956년 이후부터는 오드리 헵번과의 영화 촬영 계약을 위해서는 반드시 디자이너 지방시가 제작한 의상을 영화에서 입어야 한다는 조항이 더해졌고, 그 결과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는 함께 6개의 히트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한 각종 레드카펫 행사에서는 언제나 지방시를 피로했다.


오드리 헵번에게 지방시의 의상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으면 언제나 “그의 의상을 입으면 나도 모르게 그냥 기분이 좋아져요” 라고 대답을 했고, 지방시 역시 “패션에 있어 그녀와 나 사이에는 절대적이고, 견고한 신뢰가 존재해요” 라며 오드리 헵번의 지지에 답해 주었다.

스타에게는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시키는 ‘크리에이터’로서, 디자이너에게는 자신의 디자인을 완성시키는 ‘뮤즈’로서,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오드리 헵번은 디자이너 지방시에게 있어 ‘패션 뮤즈’ 였던 것이다.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의 일화는 이후 디자이너와 스타 사이의 관계 정립에 있어서의 좋은 사례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었고, 여기에 영감을 받아 많은 디자이너들과 스타들이 교감을 나누게 되기도 했다.   

지방시의 디렉터 ‘드레다 멜르(Dreda Mele)’는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의 오랜 관계를 이렇게 결론지었다.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는 진정 서로를 위해 존재 하는, ‘소울 메이트’이지 않았을까요?”


조벡 패션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재미 칼럼니스트 joelkimbec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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