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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평양의 도청

입력 | 2012-07-26 03:00:00


터크와 프랭클린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정예요원들이다. 국가 안보와 세계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악당들과 싸워온 이들은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절친한 사이다. 둘의 우정은 우연히 한 여인을 동시에 사귀면서 금이 간다. 어제의 ‘절친’이 오늘의 ‘원수’로 바뀌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에 돌입한다. 사소한 감정싸움 때문에 CIA의 최첨단 장비와 세계 최고 수준의 스파이 실력이 동원된다. 둘은 제각기 애인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24시간 사생활을 감시한다.

▷‘스파이 역사상 가장 치사한 전투’라는 카피를 앞세워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의 내용이다. 두 주인공은 정보기관원의 지위를 남용해 민간인을 도청하는 불법사찰을 자행한 셈이다. 한마디로 관객에게 웃음을 주기 위한 황당한 설정이다. 도청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몰락을 이끈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민주당사 도청사건에서 비롯됐다. 워터게이트 사건 훨씬 전부터 닉슨의 백악관에서는 정적을 상대로 한 뒷조사와 도청을 자행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야 도청이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만큼 위중한 사안이지만 북한에선 당국의 도청이 빈번하게 이뤄진다. 평양을 방문한 남한 사람들의 호텔방은 사방이 도청장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위층이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최근 이영호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이 전격 숙청된 데는 도청이 빌미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는 측근과 대화하다 “자기 아버지(김정일)는 바깥세상을 몰라서 개방을 안 한 줄 아느냐”고 김정은의 현실인식에 불만을 터뜨렸다가 경쟁관계인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측의 도청에 딱 걸렸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 씨가 생전에 펴낸 책 ‘김정일 로얄 패밀리’에 따르면 북한에선 당 간부들과 측근들의 이불 속 대화까지 엿듣는다. 어느 날 이 씨는 김정일이 관저에서 읽은 보고서들을 분쇄기에 넣어 잘라버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가 서류를 기계에 넣으면서 내용을 흘낏 훔쳐보니 당 간부들이 잠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부부간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엿들을 정도이니 전화 도청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영호 전 총참모장이 군의 최고위 간부로서 이를 몰랐다면 바보요, 알고도 했다면 스스로 화를 불러들인 셈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