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공포서 벗어나야 ‘새로운 인생’ 시작할 수 있다
여성의 몸에서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폐경은 그렇기에 축복이다. 가을날 낙엽으로 하트 문양을 만드는 사람들. 동아일보DB
초경이 봄, 곧 청춘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면, 낳고 기르는 여름은 중년에 해당한다. 여름은 짧다. 여름이 길다면 지구는 열기로 가득 차 마침내 폭발하고 말 것이다. 여성의 몸도 마찬가지다. 여름의 열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몸 안에 있는 피는 모조리 연소되고 말 것이다. 또 하나 월경을 한다는 건 가임기라는 뜻인데, 그것이 무작정 길어진다면 그게 과연 축복일까. 임신은 탄생의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런데 50대 이후에도 계속 임신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 여성의 일생은 꽁꽁 결박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폐경이란 실로 축복이다. 임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지만 여성들은 폐경을 몹시 두려워한다. 더는 ‘여자구실’을 못할 거라는 인식이 앞서서다. 이때 여자구실이란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성이다. 이상한 노릇이다. 왜 여성은 나이가 들어서도 ‘성적 욕구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 또 삶의 성취나 자존감의 기준을 왜 대부분 ‘남성의 구애’라는 틀에 묶어두는 것일까. 이 틀만 벗어던질 수 있다면, 폐경기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런 식의 문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여성성은 오직 가족과 성욕으로 ‘영토화’됐다. 그와 더불어 여성의 지혜는 침묵, 봉쇄돼 버렸다. 폐경기를 두려워하고 지연시키려는 욕망은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가을은 수렴의 시간이자 동시에 수확의 시간이다. 여름의 화려한 열기가 사라진 터전에서 지혜의 열매를 거둬야 한다. 그것은 결코 봄과 여름에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가을에만 가능한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가을은 우주의 대혁명이자 동시에 지혜의 대향연이다. 이 혁명과 향연에 기꺼이 참여할 수만 있다면, 폐경은 곧 축복이다!
고미숙 고전평론가